좋은 설교란?

웃기는 설교이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2/20 [22:25]

좋은 설교란?

웃기는 설교이다

공헌배 | 입력 : 2019/02/20 [22:25]

 

좋은 설교란, 첫째, 웃기는 설교이다. 왜냐하면 비유연구가들의 말을 따를 때 역사적 예수는 아주 웃겼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 그대로 이야기꾼이고, 현자(賢者)였다고 한다. 예수가 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규 교육을 받았거나 유명한 유대교의 랍비에게서 사사(師謝)했기 때문이 아니라 농촌에서 떠도는 민담을 많이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어느 곳의 자료실을 통해서 000목사님의 소중한 논문 한편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논문을 읽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000목사님이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구나!

 

2) 불트만의 설교는 참으로 무겁구나!

 

3) 그토록 비유와 예수의 말 전승을 중요 시 한 불트만이 왜 정작 그 자신의 설교에서는 예수를 그토록 무겁고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예수가 웃겼다고 해서 그 말이 진실성이 약하다거나 세상을 향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의 웃기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사회에 대한 풍자가 뚜렷이 드러난다. 풍자란, 단순히 웃기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 정치와 경제와 종교 등 각 가지를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좀 심하게 말하면 옛날에 가면 쓰고 하는 탈춤과 비슷한 셈이 된다.

 

탈을 쓰면 사람은 용감해 진다. 탈을 쓴 광대는 웃겼다. 탈을 쓴 광대는 세상이 하지 못할 소리도 고함치듯 외친다. 그게 왕의 일화이던 부자의 얘기던 종교 계 지도자들을 겨냥했든 말든 사정없이 비꼰다. 또 공격한다. 그리고 고발도 한다. 그리고 그 춤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 분위기도 한껏 뜬다. 바로 예수의 비유에 그런 성격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학자들을 꼽으면, 갓봘트(N. K. Gottwald), 옥크먼(D. E. Oakman), 조태연(“갈릴리 경제학,” <신약논단> 4, 1998. “나의 식탁에서 먹게 하라,” <신학사상> 82, 1993), 윤승은(<예수님의 비유들 연구> 서울: 성광문화사, 1997), 홀슬리(R. A. Horsley), 스테인(R. H. Stein), 이병학(“당신은 두지 않는 것을 취하고,” <신학사상> 125, 2004년 여름: 220-237), 허조그(W. R. Herzog) 등이 해당된다.

 

둘째, 좋은 설교란? 청중이 있는 설교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청중에게 카타르시스 시킬 수 있거나 그들의 근심을 해결했거나 청중에게 치유가 일어난 예전의 집행이어야 한다.

 

루돌프 불트만의 <공관복음 전승사>에서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아포프테그마가 무엇인가 경구나 선언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경구들은 결코 논리적 언어가 아니었다. 지혜 전승이었든 민담이었든 그리스의 그 어떤 형식이었든 간에 근거가 없거나 대상이 없는 아포프테그마는 존재하기 어렵다.

 

예수의 대화에는 항상 상대가 있었다. 그것이 논쟁의 성격을 가졌던 사제와의 대화이든 상관없이 그랬다. 성경의 자료들을 볼 때 예수는 확실히 독백보다 대화에 익숙했음을 알 수 있다.

 

독백은 세익스피어의 <햄릿>이나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것에서 찾는 게 낫다. 예수는 철저할 정도로 상황적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대화에 응해 주었다. 율법사에게는 율법으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정의로...

 

예수에게서는 절대화 된 교리를 찾기 어렵다. 이 부분은 불트만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 K. Bultmann,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손규태 역 <기독교 사상전집> 7, 서울: 신태양사, 1975, 191. 기독교의 진술은 교의학적 진술이 아니고 실존적 진술이다.”)

 

불트만의 설교로 논문을 쓴 000 목사님은 개방성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트만의 설교는 여전히 어렵다. 그의 글을 읽고 웃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도 진지하여, 한참 고민을 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셋째, J. D. 크로싼의 주장을 의지할 때 예수는 주술적이고, 개방된 식탁교제로 나아갔다고 한다. 예수가 꿈꾼 세상은 지혜의 나라였다고 한다. 그러나 000목사님의 논문을 참고할 때, 불트만은 현재화 된 실존적 종말론을 주장했고, 그것은 결단을 요구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이론은 다름 아닌 인간의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이나 세상, 정치, 자체 완성을 위해 나아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사람들에게 신화는 공격할 수 있다고 본다(R. K. Bultmann, “New Testament and Mythology,” Kerygma and Myth, Translated by R. H. Fuller. New York: Harper and Row, 1961, 18). 그러나 불트만은 성서의 신화와 일반 이야기를 결코 같이 보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결단을 요청하는 것은 성경뿐만 아니라 일반 문학에서도 가능하다. 그런데 불트만은 이 둘을 결코 같은 차원에 놓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불트만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성서가 다른 문헌들과 구별되는 것은 성서에서는 특정한 실존 가능성이 내가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R. K. Bultmann,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175).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향린교회 조00 목사님의 설교는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용섭 목사님은 그 조00 목사님의 설교를 무거운 은혜로 폄하했다. 그리 되면 불트만의 설교 역시 무거운 은혜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김00박사님의 주장을 따를 때 불트만은 루터교적 배경이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불트만의 설교는 상당히 강한 결단을 인간들에게 요청한다.

 

이에 비해 크로싼의 예수 상()은 그다지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특히 허조그나 멘덴홀 같은 연구가들의 견해에 견준다면, 예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청중이 없는 설교나 청중이 감안되지 않은 설교는 의미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철저히 청중 앞에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인기가 좋은 이야기꾼이었다.

 

만약 이대로 본다면 불트만이나 칼 바르트처럼 진지한 설교를 할 경우, 청중은 졸아야 한다. 바르트나 불트만은 그리스도를 아주 존중한 사람이다. 그들의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은 핵심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처럼 따라하는 데에는 실패한 사람들이었다. 그 이유는 좀 엉뚱한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해서 웃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이리 말하면, 교단의 정체성에 맞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래, 옳다.” 이따위 주장을 하는 것은 공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연히 접한 000목사님의 논문에서는 개방성을 주장했지 뭔가.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어 이런 뻘 소리도 해 보는 거다.

 

넷째, 좋은 설교란 달변적 설교다. 이런 말 하면 내가 마치 미국 식 설교학에 영향을 받아 그런 게 아닌가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이다. 난 미국에서 설교 공부하고 온 사람하고 하도 심하게 다투어 지금도 그 사람 보는 게 좀 불편하다.

 

왜 달변적 설교가 좋은 설교인가? 예수의 이야기가 그랬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가 반드시 문법적으로 완벽했다고 여길 필요가 없다. 또 중세에서 설교의 기술을 가르치듯 예수의 이야기가 수사(修辭)적 이었을 것으로 여길 필요도 없다. 예수는 비유 연구가들의 말대로 구수하게 말 잘하는 농촌의 이야기꾼이었을 것이다. 유독 신약 성경은 예수의 대화 내용들을 많이 실은 편인데, 거기서 예수가 누구하고 논쟁에서 밀리거나 져 본 적은 한 번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제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 상이 탁월한 통찰력과 달변가로서의 능력을 갖지 못했었다면 불가능한 진술 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대로 본다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청중을 졸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설교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볼 때, 루돌프 K. 불트만은 여전히 그리스도론적 사람이었지, 예수론적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불트만이 강조한 결단을 요구한 신약 성서와 신화라는 그의 특별한 논문을 참고 해 보시길 바란다. 거기서 불트만이 주로 인용했던 성경 구절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길 바란다. 만약 거기서 불트만이 서신서보다 복음서를 더 많이 인용했다는 증거를 들이댈 수만 있다면 위의 내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시해도 나는 기꺼이 수용하겠다.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비신화화는 바울과 요한이 시도했던 것이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주장은 김00박사님도 동의 하셨다. 그런데 참 특이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불트만은 그 비신화화의 과정을 거친 서신들을 왜 다시 비신화화 해야 한다는 것인가? 만약 그가 신화론적 세계관을 설명할 때 공관 복음서에 치중했다면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신화론적 세계관을 설명할 때 서신서를 인용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미 비신화화 했는데, 그것도 신화적이라서 또 비신화화 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불트만은 그리스도를 심각하게 증거 하는 데에는 성공한 사람이지만 예수를 따라 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역사적 예수와 교회의 고백이 연속적이라고 한다면, 왜 그의 결단의 강조가 청중의 눈높이를 고려하여 재미있게 전해지지 못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의 말씀을 잘 아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예수처럼 따라하지는 않은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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