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뉴스 창립 토론회의 논쟁

목양지 계승에 관한 토의

예정연뉴스 | 기사입력 2019/01/03 [18:43]

예장뉴스 창립 토론회의 논쟁

목양지 계승에 관한 토의

예정연뉴스 | 입력 : 2019/01/03 [18:43]

▲ 공헌배와 이동춘의 목양지 계승에 관한 토론회    

 

제목: 교회의 목회직 대물림(세습)에 관한 의견

 

Ⅰ. 목회직 세습 반대의견들

 

① 목사의 목회직 대물림(세습)은 교회를 공(公)개념으로 하지 아니하고, 교회를 목사의 업적물처럼 사사(私社)화 한다.

 

②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 어떤 특정인들이 사유(私有)화 할 수 없고, 보편적이므로 공(公)교회이어야 한다.

 

③목회자의 채용에 있어서 공정한 경쟁이 되지 못한다. 쉽게 말해 부모의 영향력에 의해 목회임지가 결정되며, 배경 없는 사람들에게는 불리 한 청빙방식이 된다.

 

④목회직 세습의 두드러진 사례들은 주로 대형교회들에게서 나타났는데, 왜 시골교회나 개척교회에서는 세습현상이 두드러지지 않을까? 이는 결국 목회직 그 자체보다도 큰 교회가 줄 수 있는 혜택들이 많기 때문에 세습하려는 것 아니겠는가?(이익을 따르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길이라 할 수 없다).

 

⑤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순교, 가난, 청빈, 순종, 겸손 등이지, 영광, 부(富), 명예, 사치 등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 대형교회라는 마치 거대기업과 유사한 곳에서 세습이 일어나는가? 이는 교회를 사유화했기 때문 아니겠는가?

 

Ⅱ. 반박(反駁)

 

위의 주장들은 모두 설득력 있는 말씀들이며, 지당하신 말씀들일 뿐만 아니라 매우 당위적인 말씀들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지상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지상의 교회는 죄인 된 인간존재자들의 회집이요, 문제 많은 인간 존재자들의 모임이다. 성경을 따르면, 초대 교회도 온전하지 못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바울사도가 눈물의 편지들을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문제 많은 교회였으며, 요한계시록에 등장한 아시아 7교회들 중에도 문제성들이 드러났다. 하물며 기독교의 역사가 서양보다 짧고, 아직 기독교의 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짧은 기간에 수(數)적인 급성장과 수많은 분열들로 인한 부작용들과 상처투성이인 교회들이 한국에는 즐비하다. 게다가 한국의 농어촌 교회들 및 미자립교회들의 분포도를 볼 때, 한국교회를 서구의 천년 이상 된 교회들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하다. 과연 한국인들이 천년 이상 된 서구교회를 수용할 능력들이 있었는지, 기독교는 과연 한국인들의 몸 기질(체질)에 어울리는 지부터 다시 검토해야 할 상황이다.

 

①한국교회는 근본적으로 christendom(기독교국 또는 국가교회)이 아니다. 특히 통합 측의 현(現)사태들을 고려할 때, 목사들을 책임져 줄 만한 노회들도 아니고, 목사들에게 도움을 줄만한 총회들도 아닌 셈이다. 즉 목사들은 세속의 험한 사태들 앞에 방치 된다. 노회나 총회는 개(個)교회들의 분쟁이나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들이 부족해 보인다. 주로 드러난 사태들은 세속의 법원으로의 진행 또는 교회의 분립 또는 갈등으로 인한 교회개척들이 다반사였다. 즉 교회들의 개척동기들을 보면 로마가톨릭교회나 서구 식 크리스텐돔의 교회들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개척되기보다는 임지 없는 목사들,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들 그리고 교회의 분쟁으로 인하여 밖으로 내몰린 목사들로 인한 개척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다시피 한, 험악한 판으로 내동댕이쳐지다시피 한 사태들이 많다. 그 목사들이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을 정도로 막막한 현실들이었다. 그래서 개척교회는 부득이하게도 목사가 주도적으로 목양할 수밖에 없었으며, 작은 일들까지도 목사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힘들도록 되어 있다.

 

②개척의 사태에 있어서 목사들만 독주한 것은 아니다. 만일 어떤 교회에서 장로가 사재를 틀어 헌금을 많이 하고, 그래서 개척된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서 장로의 영향력은 막강해질 수 있으며, 이럴 경우, 목사는 그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보다도 장로의 눈치를 보게 될 우려가 있다.

 

③어떤 교회에서 분쟁이 생겼다. 그러나 노회나 시찰회에서는 그 분쟁들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이럴 경우, 드러난 사태는 분립 및 교회개척이었다. 만일 이와 같은 사태에서 공교회가 되려면 노회나 시찰회는 그러한 분쟁들을 해결하고, 정의롭게 치리할 수 있어야하며, 개교회는 노회의 치리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통합 측의 노회들은 그정도의 능력들을 보여주지 못한 사태들이 다반사였다. 다시 말해 노회가 공적기능을 실행하기에는 턱없이 부실했던 사태들이 많았다. 이럴 경우, 공교회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전통의 칼뱅주의 매뉴얼에서는 그러한 분쟁들을 해결할 능력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실지로 그 당시(16세기의 제네바)에는 공동목양의 방식이 행하여졌다. 이에 비해 한국교회는 개(個)교회성이 강하다. 즉 목사개인들이 알아서 해야 하고, 노회는 책임져주지 않았다.

 

④어떤 목사가 개척을 했다. 그러면 그 목사가 굶는지 먹는지를 시찰회에서는 살펴야 하고, 노회에서는 어려움이 있으면 그 목사를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노회는 그런 일에 책임성을 별로 갖지 못했다. 물론 총회차원에서 최저생활비 지급을 매뉴얼로 하고 있지만 이는 임지가 있는 목사에 한에서이다. 실지로 한국에는 무임목사와 이중직 목회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목사의 수급문제나 생활비 문제 그리고 자녀교육문제에 있어서 노회나 총회는 책임져주지 않는 실정이다. 이럴 경우, 공(公)교회라는 주장들은 설득력 없다. 왜냐하면 전통 칼뱅주의의 매뉴얼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목사에 대해 신경을 쓰고, 책임을 지고, 고통을 분담할 뿐만 아니라 공동목양으로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⑤전통의 매뉴얼 (“The Form of Presbyterian Church-Government according to the Westminster Standards (1645),”의 “Concerning the Doctrinal Part of Ordination of Ministers.”, “The Directory for the Ordination of Ministers.”, “The Rules for Examination are these:”)을 따르면, 개교회가 목사를 모셔가기보다는 노회가 목사를 개교회로 파송하는 형식에 가깝다. 그리고 노회에서 파송된 목사를 개교회가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면 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다르다. 개교회가 청빙할 목사를 결정해놓고, 노회에는 통보하는 식이다. 이럴 경우, 한국교회는 엄격한 칼뱅주의가 아니다. 즉 회중교회적 요소들도 적지 않게 갖고 있다. 따라서 공(公)교회라는 개념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 것이 사실이다.

 

⑥한국교회에서는 목사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큰 것이 사실이다. 특히 농어촌교회들이나 개척교회들에게서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전통의 격률들처럼 교인 개인들이 강하지 않다. 한국의 교회들에서는 목사에게 민감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며(트집을 잡는다), 또한 목사에게 제법 큰 기대들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는 서구의 사태들과는 좀 다르다. 특히 현대 서양교회들에서는 심방 받는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될 듯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심방들이 실행되며, 목사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 설교의 횟수만 해도 한국은 서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수적성장을 이룬 교회들에게서 드러난 특성 두 가지를 꼽으면, 첫째, 목사의 영향력이 크거나 목사가 소신 있게 목양을 할 수 있었던 교회들이었다. 둘째, 목사의 시무기간이 길었던 교회들이었다.

 

⑦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사유화 할 수 없다는 주장처럼 타당한 신학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처럼 당위적인 주장은 현실적 설득력이 약하며, 추상적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교회는 천 몇 백 년 동안이나 유대인들을 박해했다. 종교개혁기에는 수많은 개혁교도들이 살해당하였고, 종교전쟁도 30년이나 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얼마나 많이 미워하고 죽였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영국국교회(성공회)와는 같이 성만찬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한 몸인가?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한국교회의 그 많은 가난한 목사들은 기초생활비를 지급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비도 지급받아야 정상이다. 가능하면 4대보험에도 가입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실정성을 따르면, 총회나 노회가 연약한 교회의 목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역할들은 너무도 미약하다. 그나마 있는 총회연금재단이라도 정상적 운영이 될 수 있길 기대할 뿐이다.

 

⑧목회직 세습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는 주장: 기본적으로 교회는 서로 경쟁하는 곳이 아니며, 원래의 매뉴얼에는 목사의 인사가 잘 이루어지도록 해두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이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는 한국이고, 16세기의 스위스와 같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장로파 교회 중에서 통합 측이 세습 때문에 공정하게 청빙 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몹시 추상적이다. 굳이 그런 일 아니어도 불공정하게 경쟁하고 있다. 목사지원이력서가 수 백 통씩 들어온다는 자체가 이미 기형적이며, 엽기적이다. 굳이 세습하나만 두고 공정경쟁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식이다.

 

⑨주로 큰 교회에서 세습을 결의했다는 주장에 대해: 이는 너무 당연하다. 당위적이고도 원론적 주장이라면 목회는 고생하는 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일이지만 연약하고, 죄인 된 실존들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

 

⑩현대 스위스 개혁교회에서의 목사들은 고액연봉자들이며, 업무의 부담 역시 한국처럼 과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목사들은 존중받는 편이다. 독일도 별로 다르지 않다. 성경을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순교, 청빈, 카리스마 등을 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목사들을 성경의 사도들만큼 능력 있는 종으로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 교회사와 그 전통을 따르면, 서양 크리스텐돔 식 구조의 목사들은 연봉이 제법 높았으며, 한국과 같은 분열적 사태에 직면하지도 않았다. 즉 서양 크리스텐돔 식 구조에서는 한국처럼 교파가 많지도 않으며, 한국교회와 같은 이유로 교회들이 분립되거나 개척되지 않았을 듯하다. 한국에서는 목사들이 교회나 세속으로 방치되고 있다. 즉 구조(노회나 총회)가 책임져주지 않는다.

 

모 교회의 목사님은 목양도중 교회에서 쫓겨났고, 목양도중 자식이 죽었으며, 굶주렸을 때도 있었다. 그 때 노회나 총회는 과연 그 목사에게 쌀을 주었는가? 생활비의 일부라도 가져다 준 적 있는가? 세들어 사는 교회의 월세의 일부라도 책임져 준 적 있는가? 만일 그런 일들이 없었다면, 그 목사는 처음부터 알아서 하도록 방치되었다. 그래서 목사는 알아서 했다. 알아서 개척했고, 알아서 건축했으며, 알아서 교인들도 모았을 뿐만 아니라 알아서 엄청난 일들까지 했다. 다 알아서 하지 않았는가? 노회나 총회에서는 알아서 하도록 내동댕이치지 않았는가? 그래서 목사님은 알아서 했지 않은가? 알아서 했는데, 왜 이제 와서 간섭인가? 대관절 총회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간섭하는가? 어처구니없다!

 

Ⅲ. 이동춘목사님의 주장에 대한 질의 및 코멘트

<교회세습에 대한 이동춘의 기독교윤리적 입장>

이동춘(비전교회, 장신대 겸임교수)

 

저는 이러한 토론회가 열려야 하는 현실이 이상하고 슬픕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우리 예장 통합 교단이 법으로 교회세습을 금(禁)했는데도 여전히 찬반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으로 정해지기 전(前)이라면,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찬반토론이 벌어져야 하고 벌어질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총회가 금지로 결정을 했는데 이를 두고 여전히 찬반토론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헌배의 Re: 세습방지법은 여느 헌법개정과는 달리, 급박하게 결의하였고, 마치 어느 특정교회를 겨냥한 듯 긴박하게 결의하였습니다. 충분한 토론의 과정과 연구의 기간도 없이 그 자리에서 긴급하게 결의했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하여 그토록 급하게 결의하였는지 납득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 게릴라 식 결의로 해석합니다.

 

②성(聖)스러운 총회에서 결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웃듯 보란 듯이 세습을 감행하거나 편법적 세습을 시도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총회가 결정한 것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알만한 분들이, 평생을 ‘법(法)이요, 법이요!’하며 살아오신 분들이 위법을 태연하게 하신다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슬픔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헌배의 Re: 총회의 법들이 엄중하지 않음은 총회의 헌법개정작업들이 스스로 드러냅니다. 만일 1934년도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이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면 이는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그 권위도 엄중하며, 쉽게 고치지 못하도록 잘 짜여져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통합 측의 헌법개정작업은 타 교단과 비교할 때 어느 교파 못지않게 자주 개정되었으며, 이제는 너무 많이 바뀌어 뭐가 뭔지 모를 만큼 바뀌었는데도 또 무엇이 부족한지, 여전히 헌법개정위원회가 존속합니다. 게다가 헌의안으로 올라 온 것들은 아무리보아도 전통의 칼뱅주의 교회정치를 많이 공부하지 않은 채 올린 듯 여겨지며, 교단의 7개 신학대학교의 커리큘럼에서도 칼뱅주의 교회정치 또는 제네바 교회법령 등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왔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통합교단의 헌법은 권징조례의 부분을 많이 고친 듯한데, 이는 컨시스토리의 판례록이나 초기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치리원리들을 따른 것이 아니라 형사소송법 내지 민사소송법을 그 모델로 하고 있는듯하여 여간 어색하지 않습니다.

 

③“교회세습, 문제인가?” 문제라면 왜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답을 찾거나 내놓아야 합니다. 문제가 아니라면, 역시 이에 수긍할만한 답을 내 놓아야 합니다. 더욱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성서적 근거는 있는지, 문제가 아니라면, 문제가 아님을 증명할 성서적 근거는 있는지, 그 답들을 내놓아야 합니다.

 

공헌배의 Re: 교회의 세습이 문제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명제가 아닙니다. 이런 주제들은 가능성 일 뿐이며, 논리도 아닙니다. 우리는 개교회의 의견을 존중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다루어야 합니다.

 

④신약의 예수께서 보여주신 태도는 교회세습 찬성론자들에게 그리 달가운 메시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 31-35절에 보면 유명한 일화와 함께 예수의 발언이 전해집니다.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토론할 때, 그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찾아와 문밖에서 예수를 불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발언은 의미심장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막10:33)고 반문하시며, 그와 함께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내 어머니이니라.”(막10: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입장은 혈연주의에 기댄 교회세습에 대해 ‘아니다’라고 쐐기를 박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기왕 “내 형제요 자매요 내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을 혈연주의로 보자고 하면, 예수의 혈연주의는 ‘우주적 혈연주의’ ‘구속적 혈연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직계가족에게 세습을 하는 것에 대해 ‘그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혈연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헌배의 Re: 이 말씀은 제자도를 설명한 본문이지, 세습에 연관 된 본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수장(首長)은 예수님의 동생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따르면, 초대 교회에서도 혈연을 따른 승계가 있습니다.

 

⑤교회세습을 정당화하는 여러 구실들 중에 자주 반복되는 두 가지 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녀가 부모의 담임목사직을 계승할 때 안정적인 목회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과정이 적법하게 진행되었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들을 성서적이냐고 묻지 말고 사실 관계만을 놓고 볼까요? 과연 ‘자녀가 부모의 담임목사직을 계승할 때 안정적인 목회가 가능하다’는 말은 사실일까요? ‘안정적인 목회’는 평가가 객관적이라면 몰라도 주관적이라면 이 주장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주장은 주관적 평가에 기대고 있습니다.

 

공헌배의 Re: 이와 같은 주장들은 논리가 아니라 확률이며, 보증된 규칙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잘 된다 또는 못된다’라는 주장들은 주관적이든, 좀 더 많은 통계를 들이대든 관계없이 사람들의 의지에 연관된 만족도들일 것이므로 이는 의지들 간의 충돌 문제이지, 수학적 연산이나 물리적 연관에서의 일관성도 보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말해 보는 것은 사회적 합의입니다. 그리고 그 합의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이지, 이런 일을 두고 우리한테 재판을 맡긴 것도 아닙니다.

 

⑥‘모든 과정이 적법하게 진행되었기에 문제가 없다’는 말은 어떤가요? 과연 적법이란 무엇인가요? 총회법은 무시해도, 회의 절차만 지키면 적법인가요, 혹 총회가 금지하기 이전에 진행된 것이라 적법인가요? 그리스도교는 법 이전에 자연법의 양식인 양심인데, 양심적으로 결정 과정이 진행되지 않거나 결정 자체가 양심적이지 않다면, 이는 신앙적으로 위법이 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공헌배의 Re: “총회법”하시는데, 총회법이란 것은 사회적 합의에 의해 결의된 것이며, 이는 그 어떤 인간 집단의 의지들이 투사된 사태입니다. 교회사에 나타났던 총회법들은 매우 많습니다.

 

⑦이처럼 비신앙적·비양심적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여러 교회가 세습을 자행/감행하고 있는 것은 교회를 ‘사적’(私的)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反證)입니다. ‘내가 세운, 내가 성장시킨, 나의 희생으로 된’ 등과 같은 사적 이해가 세습을 자행/감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를 일종의 가업(家業)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권력의 사유화/집중화/독점화를 통해 교회 재정의 사유화를 일삼아 왔다면, 세습은 더욱 필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 및 재정의 사유화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신정정치론’을 앞세운 결과가 분명합니다. 장로교의 제일 정신인 ‘민주적 결정’ ‘권력 분산적 결정’이 무시된 결과입니다.

 

공헌배의 Re) 비양심, 비신앙 등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까? 이와 같은 단어들은 사적감각을 따른 진술들일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이동춘 교수님이 인간신앙이나 인간양심의 재판관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을 주장해야 합니다.

 

⑧깔뱅이 구상한 중요한 직분은 목사직과 장로직이었습니다.

 

공헌배의 Re: 칼뱅이 구상한 중요 직분은 4중직입니다. 그 중에서도 목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 칼뱅은 직책에 대하여 등가적 구상을 하지 않은 듯합니다: J. Calvin,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ed. J. K. S. Rei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59-66을 따를 때, 목사에 관하여는 4페이지(59-62), 교사(박사)에 관하여는 대략 한 페이지(62-63), 장로에 관하여도 대략 한 페이지(63쪽 하단부터 64쪽 상단), 집사에 관하여는 대략 2페이지(64 중간부터 66쪽 상단)입니다. 이로 볼 때, 목사를 가장 길게 설명했고, 집사에 대한 설명은 장로보다도 더 길며, 교사 역시 설명이 길지 않습니다. 특히 66쪽부터 설명 되는 성만찬, 결혼식, 장례식, 환자심방, 교도소 방문 등(66-69)은 모두 목사의 직무와 연관되어 보입니다. 그래서 칼뱅이 구상한 중요 직분은 목사와 장로가 아니라 목사 단독입니다. 칼뱅은 압도적으로 목사에 대한 설명을 길게 잡았고,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1645)’를 읽어도 목사에 대한 설명이 압도적으로 깁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매뉴얼에 있어서 목사에 견주어 질 만한 직책은 없습니다.

 

⑨이 방법과 절차는 민주적 소통이었고, 교황제를 해체하는 대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질서를 방지하기 질서 규범을 권력으로 내 놓은 것이었습니다.(중략) 깔뱅이 이해하는 질서라는 것은 무질서와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대안으로 기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중세교회의 비민주적 위계와 독점적 권력을 해체시키고 민중에게 신의 권력을 되돌림으로 성서적 복원을 이룬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헌배의 Re: “민중에게 신의 권력을 되돌림으로 성서적 복원을 이룬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리되면 민중은 신적 권한을 갖게 됩니다. 칼뱅은 민중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⑩장로교의 지주인 깔뱅의 가르침은 권력은 질서와 혼란을 막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었지 수고의 대가로 얻는 보상책이 아니었습니다. 제도를 위한 권력이었지 사적 이익을 위한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권력 사용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될 경우 감당해야 할 결과는 늘 참혹했습니다. 비판을 받는 내용이긴 합니다만, 제네바에서 깔뱅이 내린 여러 사형(死刑) 결정들이 이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들입니다.

 

공헌배의 Re: “제네바에서 깔뱅이 내린 여러 사형결정들”이라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깔뱅이 제네바에서 형벌권을 갖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사형과 같은 큰 결정은 깔뱅이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닙니다. 이는 재판부의 결정이지, 깔뱅의 독단적 결정일 수 없던 것이 제네바의 구조로 여겨집니다.

 

⑪토론자의 한 사람인 저는 이미 앞에서, 장로교가 인정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질서를 위한 권위임을 밝혔습니다. 더욱이 이 권위는 마가복음 10장 35-45절에 근거해 ‘섬김의 권위’라는 것을 더 밝히고자 합니다.

 

공헌배의 Re: 장로교가 아니라 예수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이지, 장로님들을 섬기는 교회가 아닙니다.

 

⑫저는 앞에서, 깔뱅이 목사직과 장로직을 인정하는 과정적 절차가 장로는 평신도로서 시민 의회에서 선출되었고, 목사는 동료 성직자들에 의해 추천을 받고, 그 다음 의회의 심의를 통과하고, 그 다음 회중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고 설명 했습니다. 이는 방법과 절차에 있어 민주적 소통의 방식을 따른 것으로 당시 권력의 사유화/집중화/독점화였던 교황제를 해체하는 대안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분석된 교회세습의 이유가 권력의 사유화와 재정의 사유화로 판별이 되었다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회세습은 옳지 않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헌배의 Re: 칼뱅이 민주주의의 선구자라도 되는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그걸 민주주의로 부른다고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방식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칼뱅은 권위적 통치자였고, 그는 목사들의 권위를 충분할 정도로 인정했습니다.

 

⑬직계 가족에게의 교회세습은 권력 욕망과 사유화의 비성서적·비신학적 행위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의 소명은 전적으로 개인의 명예와 생존을 위한 경제적 행위로 비쳐지게 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성직자가 아니라, 경제적 행위와 보상을 전제로 한, 경제적 보상이 있어야만 가능한 직업인으로 각인되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도 삶에 필요한 의식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명은 그 의식주의 영역을 뛰어넘어 희생을 필요로 하는 정신적 영역이기 때문에, ‘소유’를 전제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대가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대가로 보상을 받으려는 이런 행태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성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역할을 하는 교회와 그곳에서 목회하는 목회자가 시민사회로부터 공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에서 교회세습은 사망 선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공헌배의 Re) “비신학”하시는데, 비신학과 신학과의 경계는 무엇입니까? 신학과 비신학을 판별할만한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이동춘 목사님에게 신학/비신학을 구별할 권리를 주셨습니까?

 

⑭우리는 ‘좁은 문, 좁은 길’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지, ‘넓은 문, 넓은 길’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지, ‘호화호식’(豪華好食)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非)/탈(脫)/초(超)권력적이고, 비(非)/탈(脫)/초(超)자본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세습이 권력의 유지 및 확대, 재생산에 있다고 보기에, 또한 교회세습이 자본의 유지 및 확대, 재생산에 있다고 보기에 이를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교회세습의 불가피성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현재 한국교회의 목회자 배출이 과비대화 되어있기에, 항변으로서의 불가피성 또한 변명과 핑계로 보일뿐입니다.

 

공헌배의 Re: 집단적 차원에서 볼 때, 통합 측의 목사님들이 도대체 무슨 권력을 얼마나 가졌다고 민주적이네, 탈권위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통합 측의 목사님들은 불쌍한 분들이셨고, 제대로 법의 보호를 받지도 못한 채 혼자 마음고생한 분들이 수두룩합니다. 권위가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권위도 없고, 대책도 없어서 문제가 된 사례들이 수두룩합니다. 제발 좀 통합 측에서는 목사님들에게 권위 좀 주시길 바랍니다. 마치 목사님들이 권위적인 듯 여겨지시나 본데, 실상은 많이 다릅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 고운하늘 2019/10/17 [08:36] 수정 | 삭제
  • 명성교회 문제라면 찬성이든 반대든지 이제는 논쟁을 그만하시고 잠잠히 하나님의 일하심에 맡기고 기다렸음 좋겠습니다
교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