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들

일제시대의 한국교회는 엄청난 낙관론을 가진 듯 했다!

공헌배 | 기사입력 2020/02/09 [21:03]

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들

일제시대의 한국교회는 엄청난 낙관론을 가진 듯 했다!

공헌배 | 입력 : 2020/02/09 [21:03]

 

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들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대략 윤곽을 그려보면, 일제시대와의 결별신학 또는 내한개신교 선교사들과의 결별신학과 같이 느껴진다. 물론 어느 교회사 교수님이 뭐 한국교회사라든가, 영남교회사라는 식의 말씀을 했지만 나는 그 영남교회사 주장하신 이름 있는 교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속한 교파는 에큐메니컬, WCC가입에 찬성한 곳이다. 물론 이게 내 의지로 된 것도 아니고, 나의 어머니가 원했던 일도 아니지만 태어나보니, 그 교파 소속이 돼 있었다. 맥락도, 신학도 나는 모르지만 그냥 학교에 가 보니, 그쪽으로 프로그래밍 돼 있는 곳에서 그쪽에서 주는 정보들 위주로 배웠다.

 

, 임마누엘 칸트 식 순수이성비판을 거치지 않은,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 할 무능한 청년일 뿐이었다.

 

그럼 몇 개의 사례를 찾아보자,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년 반 전에 사역이 잘 진행이 되고 있다고 들었던 곳은 강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중략) 그곳 사람들의 영적인 관심이 대단하며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중략) 세례 후보자들을 문답할 때, 우리는 대단히 엄격하며 철저합니다(H. G. Underwood,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 편지(1885-1916)>, 김인수 옮김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2), 179).

 

우리는 아주 많은 사람의 방문을 받았는데 대개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례를 바라는 듯이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그러한 지원자 중 100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언더우드 씨는 그들을 아주 신중하게 심사해 본 결과 모두가 근면하게 성서와 소책자를 연구했으며, 거의 모두가 복음의 기본 진리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Lillias H. Underwood,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 신복룡, 최수근 역주 <상투의 나라> (서울: 집문당, 1999), 116).

 

100명의 지원자 중에서 우리는 33명을 골라냈는데, 유창하게 대답했던 사람들이나 가장 훌륭한 지식을 펼쳤던 사람이 아니라 거의 분명하게 진실한 마음을 가졌으며 예수를 진실로 아는 사람들이었다.(중략) 우리는 외국인의 신분으로 조선에서 세례를 주는 것이 여권 발급의 조건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우리 모두는 강을 가로질러 청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주 엄숙하고 깊은 감동을 주는 성체의식을 가졌으며, 언더우드 씨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은 우리의 전체 여행 중 유일하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가 세례를 행한 전무후무한 많은 숫자였다. 선교사(宣敎史)의 초기라는 점에서 보면 많다고 할 이 숫자는 후에 훨씬 과장된 소문으로 퍼졌다(Ibid., 116-117).

 

그래서 세례 합격 경쟁률이 대략 31쯤 됐던 것 같은데, 이는 요사이 각 노회들에서 실행하는 장로고시보다 더 어렵지 싶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장로고시는 옛날의 세례문답 수준도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나는 신학교에서 왠지 내한개신교 선교사들은 뭔가 수준이 안 된다든가, 무언가 미흡하다는 식으로 배운 경향이 있었다. 정확하게 그렇게 발성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런 뉘앙스를 받았다. 그러나 요사이의 내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요사이의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을 일리트로 볼 수 있지만 현지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둘째,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인들을 도와주려 했으며, 한국인들의 땅을 빼앗거나 착취하지 않고 한국인들에게 많은 것들을 나누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관료들로부터 빼앗겼었던 조선 민중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말 그대로 복음(기쁜 소식)의 통로였다.

 

그들은 서양인들이었지만 오히려 한국으로 동화되려 한 자들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내가 느낀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인상을 준다:

 

첫째,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한국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분들은 서양 신학들의 유통업자들로서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을 폄하하거나 선교사님들의 신학들과는 다른 것들을 유통시키는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둘째, 내한개신교 선교사님들은 서양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이해하려 했는데 비해, 한국의 신학자들은 한국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신학의 아젠다들을 한국에 이식시키려 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한국의 신학자들은 언어능력들을 습득한 후, 자신들의 장끼인 그 번역능력들을 활용하여 그 기득권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현장인 교회 그 자체의 아픔들이나 고통들을 사회과학이나 경제학이나 역사학(한국사)의 범주에서 해석하거나 연구하는 일들을 등한 시 하는 경향들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실은 한국교회보다는 서양신학의 아젠다들을 유통시키는 일들에 익숙한 경향들이 있는 듯하다. 물론 종교 간 대화처럼 비교신학(서양신학과 한국과의 비교)을 해보지만 전문가 수준이 아니거나 전문가들로부터 검증받지 않는 경향들이 있는 듯하다.

 

서양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어와 드라비다어 비교 연구>라는 걸작을 쓰거나 거북선을 복원하는 작업들을 했지만 한국의 신학자들은 서양신학의 유통업자들처럼 행동하는 경향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현대 한국의 신학자들을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보다 더 훌륭하다고 느끼지도 않으며, 현대 한국의 신학자들 대부분을 그 과거의 서양 선교사들보다 더 못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나에게 주입한 교육은 일제시대 선교사들의 전통과는 다른 그 무엇들이었다. 즉 역사를 놓친 경향이 있다.

 

과거의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교인들을 받을 때 골라가며 받았다. , 목사가 사람을 받기 싫으면 받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목사의 성에 차지 않으면 교인을 내보냈다(출교). 그러나 오늘날의 목사님들은 교인들이 오지 않을까 봐, 절절 매는 경향이 있고, 결석만 좀 해도 놀라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거의 목사님들과 오늘날의 목사님들 중 누가 더 수준이 높을 것 같은가?

 

세례/입교의 과정들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빡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 그 당시 교인들의 수준들이 더 높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치리의 사례가 어느 정도였는지 살펴보자, 왼쪽은 년도이고, 오른 쪽은 책벌 및 출교의 숫자다:

 

1921: 1954, 1922: 2131, 1923: 3025, 1924: 3093, 1925: 3304, 1926: 3229, 1927: 2930, 1928: 3359, 1929: 2864, 1930: 2840.

(郭安連, <長老敎會史典彙集> (京城: 朝鮮耶穌敎書會, 一九三五), 二三五).

 

요사이에는 교인들이 삐쳐서 교회 안 나오면 목사님들이 달래러 가겠지만 그 때는 교인들이 다니고 싶어 해도 목사의 성에 차지 않으면 쫓아내버렸다. 이래도 교회가 성장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의 신학교육과 오늘날의 신학교육 중 어디가 더 수준 높다고 여기는가?

 

물론 시대가 워낙 많이 바뀌어 내 말이 쾌케묵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옛날의 선교사님들에 비교할 때 뭔가 수준들이 많이 딸리지 않을까?

 

그 당시의 치리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재판국 일 리는 만무하다. 그 당시의 목사님들은 법대 출신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기록으로 유추하면 목사는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다. 좀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다. 그 부담스러운 목사들을 견디는 것이 교회생활이었다. 그리고 16세기의 제네바(칼뱅의 시대)때에는 이게 훨씬 더 심했다. 그래서 목사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교회생활이었다.

 

그러나 광복이후 갈라진 교파, 내가 속한 교파의 모 교회들에서는 목사가 교인들을 견뎌내야 했다. 새로운 민주화의 바람들이 불면서 인권, 인권해 댔다. 그게 심해 말도 안 되는 임시목사제도의 오용(이 부분은 내 논문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온다: <한국조직신학 논총> 35)은 목사들을 파리목숨처럼 만들었고, 도저히 그 교회의 교인들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목사직을 그만 두거나 개척하는 길 외에는 달리 수가 없었다.

 

, 일제시대에는 교인들이 목사님께서 실행하시는 훈련들을 견뎌야 했지만 광복 이후부터의 모 교단은 목사들이 교인들을 견뎌내야 했다. 그렇다면 어느 시대의 신학교육이 더 수준 높은가?

 

물론 이것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감상일테지만 내가 배운 신학교에서의 교육들은 아예 선교사님들의 매뉴얼들을 생략했거나 간혹 선교사님들이 폄하되듯이 배웠다(선교사님들의 자료들을 읽혀주지 않았으면서도).

 

일차자료들을 찾을 능력들이 없던 그 당시의 나로서는 그 신학교육의 커리큘럼에 맹목적으로 세뇌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교회는 세속이 추구하는 그런 종류의 민주주의 교육이나 NGO나 시민사회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다.

 

더러 어떤 분들은 목사님들의 수준이 낮아졌거나 목사님들의 교육 수준들이 낮다고 투덜 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그게 왜 목사님들의 책임인가? 총회의 책임이다. 그 수준 낮다고 생각하는 목사들을 누가 세웠는가? 총회가 주도하여 세우지 않았는가? 책임져야 할 총회는 어디로 가고 왜 목사들만 곱씹는가?

 

그 목사님들은 피고름을 짜듯이 신학교육기관에 헌납하시고, 세속으로 가서는 학대받으며, 교인들이 주시는 시련들까지 견뎌내시기도 했다.

 

물론 다 그랬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들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보자!

 

과연 일제시대의 한국 신학이나 한국교회들이 무의미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쉽게 말하면, 일제시대에는 교회에서 쫓아내도(출교) 다니고 싶어 했던 교인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목사가 교인들이 삐칠까 봐 신경 써야 한다.

 

어느 편이 더 좋다는 뜻이 아니다. 일제시대 패러다임의 한국교회가 가졌던 낙관론이나 그 시대의 교회가 가졌던 카리스마나 교회가 주도할 수 있었던 그 시대상이 무엇이냐를 파악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러니까 초기 한국의 개신교는 줄 세워, 테스트해서 교인들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교회에 다니려고 줄 서서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이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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