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의 새벽기도이야기!

어느 분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한 글

공헌배 | 기사입력 2019/10/16 [10:22]

어느 목사님의 새벽기도이야기!

어느 분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한 글

공헌배 | 입력 : 2019/10/16 [10:22]

 

아래는 2019115, 저의 페이스북에 공유 된 글입니다. 그분에게 여쭙지는 않았지만 읽어보시라고 하셔서, 저의 페이스북에서도 공유했습니다. 혹시 이 글이 <경건과 학문>에서 기사 화 된 데 대해 이의가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시고, 제가 곧 바로 삭제 하겠습니다.

 

제가 그분의 연락처를 몰라, 여쭙지는 못했지만 이미 그분께서 페이스북에 공개하셨으므로 여기에 싣습니다. 혹시 실례가 된다면 용서바랍니다^^

 

아래는 옮긴 글입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의 설교

 

제목: 새벽기도의 뿌리는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아이를 많이 낳았다. 딸을 아홉 낳고 나를 낳았다. 어떤 계획이나 책임을 지고 낳은 것이 아니라 그냥 낳기만 했다. 아버지는 밖으로 다니시니까 어머니께서 늘 우리를 데리고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나의 새벽기도의 뿌리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믿을 것도 없고, 애들은 많고, 먹을 것도 없으니까 새벽의 문을 두드리며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어머니의 기도를 내가 물려받은 것이다. 열여섯 살 때부터 새벽종을 쳤다. 전도사를 하고, 목사를 할 때도 집사님이 치려고 하면 내가 친다고 했다. 늘 새벽에 하나님께 나갔다. 기도제목이 많으니까 일찍 나가야 했고, 늦도록 기도해야 했다. 그래서 새벽이 몸에 배인 것 같다.

 

새벽은 처음 예수님이 여셨고, 또 길선주 목사님이 이어주셨다.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새벽기도 안 하신 분이 없다.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움이 많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나는 한국교회가 새벽을 통해 살아났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릴 적에는 가정이 가난하고 집안에서 혼자 믿으니까 사랑을 받지 못했다. 영육이 극한상황에서 살다보니 성격이 비뚤어질 수 있고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었는데,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성격이 밝아지고 좋아졌다. 밤은 깜깜하지만 새벽하늘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늘 위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밝게 살았다. 친구들도 내가 너무 밝게 사니까 나를 부잣집 아들로 생각했다. 교회는 주일학교 다닐 때부터 멀리 있어도 다녔고, 군에서 훈련받을 때도 새벽에 일어나 군인교회가 문 열지 않으면 식당에 가서 기도했다. 어디에 있든지, 어떤 환경에서도 늘 새벽기도의 줄을 놓지 않았다.

 

주의 일과 기도생활이 다 경험하듯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열여섯 살 때 잠이 많은 데도 그 시간이 되면 딱 눈을 뜨게 했다. 잠을 깊이 자면 중간에 절대 안 일어나는데 새벽기도시간은 주님이 꼭 깨워주셨다. 아버지와 같은 방에 잤는데, 태엽시계를 4 시에 맞춰놓으면 소리가 난다. 벨소리가 나면 교회 안 나가시는 아버지에게 엄청난 기합을 받으니까 시계를 옷에 둘둘 말아놓고 자다가 옷 속에서 벨소리가 나면 누르고 마당에 나와 옷을 입고 새벽종 치러 갔다.

 

내가 속한 군부대에는 교회가 없어 민간인 교회에 다녔다. 한 번은 기합을 받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몰래 교회에 가서 저녁예배를 마치고 절뚝거리며 들어가니 비상이 걸려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또 엄청난 기합을 받아 보름 동안 서서 대변을 봤다. 늘 엎드려 지냈다. 믿음은 환경이 좋아서 잘 믿는 것이 아니고, 누가 믿게 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내가 지키는 것이다.

 

1969년 지방에서 신학교를 마치고 안동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조그만 교회였다. 너무 어려웠다. 교회가 매달 주는 쌀 2말과 현금 2천 원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어린애도 있고, 결혼 한지 얼마 안 된 아내가 스텐 그릇 팔러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다 저녁에 마늘이나 고추로 바꿔오면, 내가 시장에 내다 팔아 밥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첫 돌이 지난 딸이 한 1년간 아팠다. 자꾸 감기 들고 아파했으나 돈이 없어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고 내가 침을 놔주었다.

 

뒤늦게 병원에 가니까 늦었다고 했다. 폐렴하고 뇌막염이라고 했다. 3일 후에 죽었다. 병원비로 37백 원이 나왔으나 낼 돈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돈 내고 애를 데려가라고 했다. 한 달 돼도 마련할 수 없다고 하니 데려가라고 했다. 그러나 차비가 없어 애를 데려 갈 수 없어 또 병원의 앰블런스를 얻어 내가 직접 산에 묻었다.

 

곧이어 여자 동생이 태어났다. 애를 데리고 삼칠일도 안 됐는데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피를 토했다. 폐병에 걸린 것이다. 3년 후에는 아내가 피를 토했다. 다 죽는구나 생각했다.

 

나를 키운 것은 어머니의 새벽기도, 하나님과 기도하면 안 되는 게 없어.

나누면 많이 먹고, 잘 먹고, 떳떳해

 

1973년 우리 노회 목사님들과 내장산에 갔다. 은퇴하신 80세 넘은 목사님도 올라가는데 서른서너 살 된 나는 백 미터도 못 가 여관에 남았다. 마지막이 온 것이다. 강단에 서면 안 넘어지려고 강대상 양쪽을 붙잡고 악을 썼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폐병이 서서히 나를 죽였다.

 

어느 날 앉아 있다가 찬송가를 펼치니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찬송이 나왔다. 몇 시간 동안 그 찬송을 불렀다. 기쁨이 충만해졌다. 기도는 늘 하지만 고쳐 달라는 기도는 안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다 이런 길인 줄 알고 받아들였다. ‘고쳐야 되겠다이런 생각보다는 항상 잘 믿어야겠다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서서히 죽어갔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니 힘이 났다.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날이나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찬송을 부르다 일어나 혼자 춤을 췄다. 기적이 일어났다. 찬송 많이 불러 폐병이 나았다. 그때부터 서서히 소생했다.

 

실명기도 있었다. 옳지 않은 사람은 시련이 많다. 성경에 이삭은 별로 어려움이 없었는데, 야곱은 성격도 그렇고 문제가 많아 어렸을 때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간증이 많은 사람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옳지 않은 목사라고 생각한다. 확실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어려움에 들어가게 하셔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 같다.

 

장신대에 다닐 적에는 해양교회를 담임하면서 미사리 근처에서 자전거로 통학했다. 아침에 새벽기도 마치고 직장에 들어가는 분들의 예배를 봐드리는 공장교회였다. 훌륭한 장로님이 세운 교회인데 3백 명의 직원이 교회에 나왔다. 8시부터 8시 반까지 예배를 보고 자전거를 타고 장신대에 가야했다.

 

장신대는 1분만 늦어도 지각처리하고 3번 지각하면 하루 결석이다. 결석 몇 번 하면 졸업 안 해줬다. 30분 내에 가기 위해 시내버스와 경쟁하듯 달렸다. 버스를 앞지르면 버스가 앞을 가로막고 욕을 했다. 1초도 늦으면 안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나의 꿈은 국화빵 구워 파는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 팔아 사먹고, 어머니가 보리쌀 주면 그걸 팔아서 사먹었다. 그때는 국화빵 장사라도 하면 축복이겠다생각했고, 교회에 있게만 해주시면, 무슨 자리라도 교회에서 살게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사랑했다.

 

우리 가족이 병에서 치료되는 경험,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면서 문제를 크게 보지 않게 됐다. 명성교회를 개척하면서 어떤 암환자가 와도 못 고친다, 안 된다 이런 생각이 안 들었다. 내 병보다 아무 것도 아니니까.

 

백 미터도 못 걸은 내 입장에 비하면 뭐가 어렵겠는가. 하나님이 우리 집을 어려움에서 이끌어 주신 것을 보면 이 세상에 안 된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큰 문제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기도하면 뭐가 안 되겠는가. 맞고 낮아지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 얼마든지 더 크게 될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너무 가난하고 어렵다보니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막으시고 깨달음을 주셨다. 신학교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다 집에 가면 어머니가 송편을 해주셨다. 방에 4명이 지냈는데 내 관물함에 넣고 혼자 먹었다. 너무 귀한 송편이니까.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애들이 잘 때 몰래 먹었다. 송편 가져오면서 애들이 자기를 바랐는데 더 안 잤다.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송편 하나 먹는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소리 안내고 먹어야 하니까 모두 코 고는 소리 확인하고 하나 먹는데 30분이 걸렸다. 다음 날 아침 애들이 학교에 올라가야 먹는데 안 올라가는 애가 있으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욕심은 인간관계를 파괴했다. 참 나쁘더라. 그런데 이틀 지나면 곰팡이가 피고, 3일 지나면 냄새가 나서 다 버렸다. 그 때 깨달은 것은 혼자 먹으면 다 먹지도 못하고, 힘들고, 살기가 어렵다. 나누어야 한다. 같이 먹어야 한다. 그래서 목회방향을 나누는 목회, 같이 먹는 목회로 정했다. 그래야 나도 많이 먹고, 잘 먹을 수 있고, 떳떳하다.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는 화합하면 어마어마한 힘이 일어날 수 있다. 바가지도 조그마한 금이 가면 물이 새는데, 이 나라가 금이 하나만 간 것이 아니라 전체가 다 갈라졌다. 우리 한국교회가 힘을 모으고 연합하면 치료가 쉽고 수습도 쉽다. 큰 교회도 욕심내지 말고 작은 교회도 소외감을 갖지 말고 다함께 손에 손을 잡고 일어나면 이 민족은 일어날 수 있다.

 

우리 교회가 힘이 있었던 것은 사도행전의 교회였다. 주님이 교회를 세워주신 것은 이 땅이 목적이 아니다.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이다. 여기는 잠깐이다. 백 퍼센트 간다. 언제 갈지 모른다. 땅에 사는 동안 이 땅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산다. 물질주의, 이기주의, 명예, 자손만대에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형통하고, 크게 집에 집을 짓고, 금에 금을 더 하고, 입고 또 입고, 가지고 또 가지려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기쁨을 땅에서, 만족을 땅에서 하려고 한다. 모두 주님이 데려 가시려고 해도 안 가려고 한다. 여기가 훨씬 좋다고. 방향을 본향에 맞추면 모든 기본은 살아난다. 기도도, 헌신도, 겸손도, 사랑도, 거룩함도 살아난다. 모든 것이 살아날 수 있다. 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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