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치준 목사님의 발언에 대하여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7/02 [20:23]

노치준 목사님의 발언에 대하여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

공헌배 | 입력 : 2019/07/02 [20:23]

 

20189, 총회 첫 날 스타목사님이 등장하셨는데, 그분은 사회학자요, 장로 출신의 목사님이며, 다소 늦은 나이에 신대원으로 입학하셨던 광주 양림교회의 전() 당회장님이셨다.

 

이분의 말씀에 대해 두 가지의 맥락에서 분석하겠다: 하나는 도스또옙스키와 칼 바르트의 맥락이고, 다른 하나는 디트리히 본훼퍼의 맥락이다.

 

먼저 도스또옙스키의 맥락이다:

 

도스또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는 일종의 신학서적처럼도 읽히는데, 특별히 신정론의 문제를 다룬 반역대심문관이 꼽힌다. 이외에 수도원장 조시마의 연설들도 눈 여겨 볼 만 하다.

 

특별히 대심문관은 칼 바르트가 <로마서 강해> 2판에서 몇 차례 언급했던 것이기도 한데, 이는 무신론자인 이반의 극시(劇詩)’이다.

 

길게 설명할 수 없어, 핵심만 말하면, /근세 스페인의 종교재판 현장으로 예수께서 오셨고, 그 예수는 감옥에 갇히며, 몰래 찾아 온 추기경과 예수와의 면담이 나온다. 거기서 예수는 아무 말씀 없다.

 

추기경의 긴 독백과 같은 말들이 현실교회를 잘 조명해주고, 예수가 다시 온다면 어쩔 수없이 교회의 권력에 의해 처형당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해 준다(화형으로 처형).

 

매우 놀라운 이 상상력은 무신론자인 이반의 머리에서 나왔다.

 

아마도 칼 바르트도 이에 충격 받은 듯 했다. 그랬기 때문에 칼 바르트가 교회의 유죄라든가, ‘종교의 한계와 같은 것들을 거론하지 않았을까?

 

, 교회의 머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이지만 이는 선언적 진술일 뿐, 현실 교회에서는 많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들을 때, 노치준 목사님의 그 말씀은 신선했을 법 하다!

 

헌법 제286항이 교회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이 교회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데 있습니다!”(박수: 짝짝짝)

 

그러나 다른 하나의 맥락에서도 살펴보자:

 

칼 바르트와는 동시대를 살았던 디트리히 본훼퍼가 있다.

 

디트리히 본훼퍼는 교회론의 신학자이며, 사회철학적 신학자이기도 하고, 현실 참여적 신학자일 수도 있고, 일명 ()종교적 그리스도론자이기도 하다.

 

어딘가 모르게 노치준 박사처럼 사회과학이라는 영역에서 전공이 겹치기도 하는 듯 여겨진다.

 

특별히 디트리히 본훼퍼는 사회철학을 연구의 도구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 논문의 원 제목은: Sanctr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이다. 그 유명한 디트리히 본훼퍼의 박사학위 논문이며, 신학자 칼 바르트가 신학의 기적으로 칭찬한 이채로운 논문일 뿐만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은 이 논문을 제출할 당시 그의 나이가 21세 정도였다. 21세에 박사학위 논문제출이라...

 

대한민국이나 미국에서는 제도적으로라도 가능하지 않을 성 싶다.

 

본훼퍼의 지도교수는 라인홀트 제베르크였으며, 그 제베르크는 교리사적으로 볼 때 권위 있고 유명한 교의학자였다. 그리고 본훼퍼는 베를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7년 경의 베를린대학교가 독일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가졌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 하다. 물론 디트리히 본훼퍼의 아버지는 대학교의 교수였다. 다시 말해 우성인물에게서 배출 된, 우성적 유전인자를 안고 태어난 전형적인 금수저이다.

 

다시 말한다: 디트리히 본훼퍼는 전형적인 독일 식 크리스텐돔 교육의 수혜자요, 부모로부터 우성 유전인자들을 물려받은 행운아였으며, 머리가 너무도 좋아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금수저였다.

 

그럼 이제 그 놀라운 금수저 출신 신학자의 주장들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나라가 예정된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면,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로 선택 된 사람들만을 포함한다(1:4, 벧전 1:20): 유석성, 이신건 역, <성도의 교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194).

 

Re: 어머나! 본훼퍼가 칼뱅을 인정한 거여? ∼∼∼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예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형태 속에 그러하다(같은 책, 194).

 

Re: ∼∼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제2판은 읽지 않은 겨?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가 본훼퍼의 박사논문보다 좀 더 빨리 출판 됐을 텐데,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라구?

 

교회는 자유교회가 아니라 국민교회로 존재한다.(중략) 이것은 경험적 교회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같은 책, 195).

 

Re: 머시라 고라? 그럼 교회는 국가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이고 국민교회적인 교회형태는 매우 큰 힘을 갖고 있다. 이런 점은 교회의 역사성을 멸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간과되었다. 교회를 향한 진정한 사랑은 교회의 더러움과 불완전함을 함께 지고 사랑할 것이다(같은 책, 197).

 

Re: 교회의 불완전함들을 함께 지고 사랑해야 한다고 본훼퍼가 가르치지 않았는가?

 

교회사적으로 교회가 완전했던 적이 단 한 세기라도 있었는가? 초대교회나 고대 교회는 흠결들이 없었는가? 그래서 교회인가? 아니다! 교회공동체는 때 묻은 교인들, 흠 있는 인간들이 모여, 천국 갈 때까지 서로 쥐어박고, 얻어터지며, 아파해가면서 고통들을 겪는 곳이다.

 

다시 말해 문제 있는 인간들끼리 모인 냄새나는 인간들의 공동체이다. 바로 이 공동체를 두고 디트리히 본훼퍼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뉴스앤조이와 같은 언론들이나 세반연과 같은 주장들을 들으면 속이 상한다. 본훼퍼의 책 좀 더 읽으셨으면 좋겠다!

 

교회는 자신의 마당에서 가라지가 자라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무엇이 가라지인지를 분별하는 척도를 어디서 가져올 수 있는가?(같은 책, 198).

 

Re: 사실 나의 목양방침은 가라지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내 목양의 방침은 가라지를 솎아 내어 곡식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데 있기도 했다. 그러나 본훼퍼를 보시라! 가라지도 놔 두시라고 했다. 더 특이한 것은 누가 알곡인지, 누가 가라지인지를 분별하는 판별식을 허용하지도 않은 듯하다.

 

이에 비해 000목사님이나 CBS나 존경받는 교수님들이나 JTBC, 뉴스앤조이 등은 자신들이 잣대가 되어, 판별식의 적용을 아주 많이 해대지 않았는가?

 

그 유명한 금수저 신학자요, 21세에 박사를 받은 베를린대학교의 대()신학자도 함부로 하지 않은 비판들을 한국의 목사님들이나 언론들이나 신학자님들은 왜 그리도 자주 하셨는가?

 

결혼한 부부가 잘못을 저지르듯이, 교회도 잘못을 저지른다. 교회는 전체로서 하나님의 부름과 세움을 받는다(같은 책, 229).

 

Re: 이거 칼 바르트나 츠빙글리가 들었으면 노발대발 하지 않았을까?

 

교회 안에서는 물론 공동체와 사회와 지배집단이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런 구조는 오직 영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에 우리는 영의 교제에 관해 말한다.(중략) 공동체의 생활원리는 사랑이기 때문에 인간들 상호 간의 사회적 태도들은 극복된다(같은 책, 233).

 

Re: 000 목사님이나 뉴조와 같은 언론들이나 세반연과 같은 공동체에서 과연 본훼퍼의 이와 같은 주장에 동의하여, 그분들의 태도들을 바꿀 수 있을까? 그분들을 통하여서는 비판들만 들었고, 사랑은 느낄 수 없었다.

 

같은 책 236-239에서는 소()종파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모두 언급했다. 즉 본훼퍼에 의하면, 소종파교회나 로마 가톨릭과 같은 큰 교회 모두 교회다. 다시 말해 본훼퍼는 큰 교회, 작은 교회를 구분하여, 교회에서 제외하거나 보편교회에서 도외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una)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 하나가 된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한 분의 주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가 거룩하다(sancta)고 믿는다. 왜냐하면 거룩한 영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가 보편적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온 세상을 향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교회는 존재한다(같은 책, 242-243).

 

Re: 어떤 분은 명성교회더러 교단에서 탈퇴하라고 권고까지 하셨더라!

 

과연 본훼퍼라면 그렇게 말했을까?

 

독일에서 신약학 분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시고, 부자들 많이 다닌다는 그 교회의 당회장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미안하지도 않은가?

 

교단에서 떠나라니! 그런 말씀이 어디 있는가? 무슨 권리로 한 교회를 쫓아내겠단 말인가?

 

그 명성교회가 이단이라도 되는가? 왜 쫓아내려 했는가? 본훼퍼가 그리 시켰는가?

 

그리고 통합 교단 총회는 명성교회를 교단에서 쫓아내고 싶은가? 무슨 권리로?

 

명성교회도 엄연히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다! 누구 맘대로 나가라, 말라 한단 말인가?

 

본훼퍼의 말을 따르면: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 명성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걸 좀 심하게 표현하면, 교단에서 명성교회를 탈퇴시키려는 의도는 그리스도를 교단에서 쫓아내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지난 총회 때 어느 목사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한다는 듯이 발언하셨다. 잘 생각해보시라! 명성교회가 교단으로부터 집단 따돌림 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슬피 우시겠는가!

 

더러 명성교회에게 서운했거나 명성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은 분들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는 명성교회를 안고 가야 한다. 본훼퍼가 말했지 않은가?: 교회=그리스도!

 

아프더라도, 섭섭했더라도 우리는 명성교회를 사랑하고, 안고 가야 한다! 총회 안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귀하듯이 명성교회도 귀하다!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공동체이다.

 

예수님의 피 값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의인들이라서, 완전하여 흠이 없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땅으로 오신 줄 아시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우리는 다 인간들이며, 냄새나는 죄인들이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걸 가르쳐주지 않는가!

 

이제 변증법적으로 붙여보자: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훼퍼와의 주장에는 대립각이 있는 듯하지만 교회론의 신학이나 교회를 깊게 고려한 신학에서는 공통적이다. 왜냐하면 칼 바르트는 기독교 교의학을 쓰지 않고, ‘교회교의학을 썼을 뿐만 아니라 칼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요, 설교가 신학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뺀 칼 바르트의 신학은 생각할 수 없다.

 

본훼퍼와 칼 바르트는 독일 식 크리스텐돔의 신학이 당시 유럽사회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졌는지를 몸소 체험했으며, 교회가 얼마나 위기였는지, 교회가 얼마나 잘못 갔는지를 알 수 있을 신학자들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신학자 모두, 교회를 몹시 사랑했던 것 같다.

 

단지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특이하게도 디트리히 본훼퍼는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칭찬한 듯 했고, 칼 바르트는 본훼퍼의 박사학위 논문을 신학의 기적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어떤 것인가?

 

종교는 권력인가? 잘 모르겠다: 하기에 따라서는 권력화 될 수도 있고, 박해받을 수도 있다.

 

종교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인가?: 지탄받을 수도 있고, 칭찬받을 수도 있으며, 무관심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의 대형교회들은 무엇들인가?: 기적들이다!

 

다종교사회에서 대형교회들이 존재할 수 있고, 개신교의 역사가 짧은 사회에서 세계사적으로도 놀랄만한 대형교회들이 대한민국에 있다.

 

조선은 원래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기독교가 일찍 뿌리 내린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이로울 만한 규모의 교회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대형교회들은 미움을 받거나 질투의 대상이 되거나 신학의 스승들로부터 지탄 받아야 할 의무들이 있는가?

 

과연 작은 것들이 아름다운가? 어느 인터넷 언론매체의 글들을 읽어 본 경험에 의하면, 한 가지의 일관 된 의견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작은 교회들이 아름답다, 가난이 존중받는다, 섬김이 아름답다, 종의 리더십, 대형교회 반대, 목양지의 대물림 반대 등.

 

이들은 왠지 디트리히 본훼퍼의 신학이나 칼 바르트의 신학 등을 존중하는 듯한 인상도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학의 스승들을 존중하는 듯한 인상들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트리히 본훼퍼의 교회론에는 대형교회와 소형교회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작은 것이 더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크다고 더 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교회인가의 문제가 남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들의 의지들은 그리스도께 순종할 능력들이 몹시 부족하다!

 

사도 바울께서도 하기 힘들 일을 현대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요구하기란 몹시 무리다!

 

그러니 미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 게 좋을 듯하다!

 

정리하면; 노치준 목사께서 하신 말씀은 선언적 당위이기 때문에 선동적 흥분에는 성공했지만 명성교회의 자유가 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침해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없었다!

 

보다 더 분명한 설명을 듣고 싶다!

 

아울러 그분이 시무하셨던 광주 양림교회도 그 지역에서는 비교적 일리트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광주 양림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침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였는지에 있다!

 

디트리히 본훼퍼는 독일 국가교회가 아돌프 히틀러정부와 어떻게 야합했는지를 너무도 잘 경험한 사람이다.

 

바로 그 본훼퍼가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라고 했다.

 

혹시 노치준 박사께서는 독일 식 크리스텐돔의 교회가 명성교회보다 더 선()했다고 생각하는가?

 

디트리히 본훼퍼가 박사논문을 쓸 당시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이후였다. 다시 말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제국 당시, 독일교회가 무슨 일을 저질렀으며, 몇 명의 신학자들이 국가전쟁 정책 찬성에 합의 했는지도 경험한 이후였으며(93인 전쟁지지성명), 소위 젊은 칼 바르트가 암흑의 날을 경험했다고 하는 그 놀라운 날 이후에 쓰여 진 논문이 <성도의 교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 교회를 경험한 디트리히 본훼퍼의 논문에서 그는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했다.

 

이게 제정신인가? 독일제국을 경험했을 만 하며, 1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교회가 어떻게 했는데, 감히 디트리히 본훼퍼는 그리도 교회를 사랑했는가?

 

그렇다면 노치준 목사님께서는 디트리히 본훼퍼보다도 더 의로워 명성교회에게 그리도 비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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