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신학교수들

좀 더 정직했어야 하지 않을까?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5/28 [18:47]

웃기는 신학교수들

좀 더 정직했어야 하지 않을까?

공헌배 | 입력 : 2019/05/28 [18:47]

 

필자가 신학에 입문한지는 대략 30년 쯤 된다.

 

그런데 이미 그 당시에도 적지 않은 말들이 나왔다:

 

교회는 위기이다!” “서구교회는 몰락 추세이다.” “칼 바르트는 위기의 신학자이다!” “J. A. T.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이>는 오래 전 영국사회에서 관심을 모았다.” “교회는 시대정신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교회에 과연 희망이 있겠는가?” .

 

평소 잘 몰랐고,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정보들을 그분들 나름대로는 준 듯한데, 중요한 정보 하나를 결정적으로 빠뜨리셨다!

 

고로 다른 직업을 찾아보도록 하시오!

 

바로 이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

 

이는 필수적이다. 그분들 말씀대로 정말, 교회가 그토록 위기라면 빨리 탈출하도록 안내방송 내지 경고방송을 해주셨어야 할 텐데, 바로 이 비상 매뉴얼을 누락했다. 혹시 이는 의도 된 것일까?

 

실컷 위기라고 말씀해 놓고서는 신대원 입시를 준비하란다! 과연 이를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신대원 입시야 말로 목사후보자들을 위한 과정인데, 그분들의 말씀으로는 교회가 너무도 절망적이게 들리게끔 했다. 그런데 왜 신대원을 가야 할까?

 

수 십 년이 지나도 한 가지의 이유 말고는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신학교수님들의 높은 연봉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참으로 머리가 나쁜 것 같다: 그로부터 20이상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고민해서 얻은 답이 이 정도에 불과하니 말이다!

 

우선 교회가 위기인지 아닌지를 논해보면, 언어철학으로 할 때, 헛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인문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언어철학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특히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의 영역에서는 그런 점이 있다.

 

그럼 자연과학에서는 가능할까? 충분하지 않다. 가장 확실해 보이는 수학은 가능할까? 그래, 수학만큼 확실한 게 없지!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 수학에 대해서조차도 어떤 대목에서는 사이비 명제로 평가한다.

 

하물며 신학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논리적 확실성은 제외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회학이나 경제학으로 말해보자:

 

경제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래프나 통계, 데이터 등으로 말한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런 일을 좀처럼 하지 않더라! 그래놓고서는 위기란다! 무슨 위기인가?

 

그것이 참말이든 거짓말이든 자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문화인류학자들은 범위를 좁혀, 훨씬 더 깊게 들어간다. 다시 말해 심층조사에 착수한다. , 사회학에서는 데이터나 설문조사, 그래프 등으로 말하지만 사회(문화)인류학에서는 아예 현지조사에 들어간다. 그래서 실지의 사태가 어떤지, 조사하여, 분석한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그런 조사를 별로 하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 학문적 신뢰도에 있어서 죄송하지만 관심 가져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

 

적어도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주장에 있어서는 그렇게 느껴진다!

 

심히도 주관적 주장이었겠고, 무슨 뜻인지 소통도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님들의 의견에 일단은 귀를 기울였다!

 

그래, 좋다! 위기라고 해보자!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위기인데, 교회로 가라는 것은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쉽게 말해, 망해가는 기업을 찾아가 취업하란 소리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내가 아무리 지능이 낮기로서니, 이 말을 못 알아들어서야 하겠는가!

 

그래서였는지 확실하게는 모르겠는데, 바로 그 위기의 신학(변증법적 신학?)을 강의했던 훌륭하다고 소문난 그 대단한 교수님을 찾기로 했다. 원래 그분은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어려운 걸음으로 모처럼 시간을 내주셨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했는데, 그분의 답이: 당신의 아버지와 상의하시오!”였다.

 

뭐 이런 희한한 일이 있는가?

 

그럴 거면 진작에 아버지와 상의하지 뭐 하러 교수씩이나 찾겠는가?

 

웃기지 않은가?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자료가 있었다. 그나마 양심적이고, 노력이 들어 간 논문 한편을 발견했다:

 

고용수, “예장교역자 수급계획을 위한 조사연구,” <敎會神學> ⅩⅦ (1985. 5): 403-460였다.

 

그래서 교역자들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고논문을 이미 1985년에 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편의 논문이 있던데, 그분은 그래도 한국교회에서의 연구주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정도는 아시는 분 같았다:

 

오성춘, “목회학적인 관점에서 본 방언체험의 가능성과 제한성,” <敎會神學> ⅩⅦ (1985. 5): 96-129.

 

 

이런 주제는 그 주장이 옳던 그르던 간에 한국교회에서는 필요한 논문이었다.

 

과거의 신학교수님들은 그래도 교회현장에 간접적으로라도 신경 써 볼 만한 논문을 썼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교회현장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교회에서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한편의 논문을 써, 투고했다:

 

“16·17세기 브리타니아의 치리서에 나타난 항존직

 

그랬는데, 게재불가의 판정이 나왔다. 그 이유는 수준이 낮아서 못 싣겠단다! ∼∼∼

 

교수 세 명이 달라붙어 16세기 영어로 된 일차자료를 번역하며, 분석하였고, 이를 토대로 필자가 쓴 논문인데, 수준이 낮 단다!

 

나중에 책을 출판하여, 그 책의 부록에 그 논문을 실었더니, 어떤 목사님들은 그 논문부터 보더라!

 

다시 현지조사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의 지()교회들은 현지조사가 쉬울까? 쉽지 않을 듯하다. 어떤 점에서는 자신들의 치부들이 드러날 만 한데, 누가 현지조사에 응하겠는가?

 

이건 인류학자들이 투입되어도 매우 힘들 일이다. 그런데 과연 신학자들이 이를 실행 하겠는가? 가능성이 낮다!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는 겉돌아가듯 하는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조사자체도 어려운데, 어떻게 대안씩이나 내놓겠는가?

 

신학자들이 하는 일반적 주장을 들어보자:

 

신학은 신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고, 따라서 신의 계시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 고로 인간들이 할 일은 없다! 단지 계시를 증언하면 된다. 그러나 이는 학문이 아니다!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주님의 인도가 있길 바라겠오!” 이는 자신은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시면 되기 때문이다.

 

기도해 봅시다!”이 역시 무책임한 말이다. 기도를 하는데, 자신이 타인에게 무엇을 해 줄지를 알려주어야 한다. 기도만 한다면, 추상적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적 환산이 어렵다!

 

어떤 점에 있어서 교회에서 쓰는 발성들은 누구 말처럼 사회적 방언과 같다. , 추상적이며, 알아듣기 힘들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만 하셨는가? 그럴 리 없다. 실은 인간들이 많이 개입되었다!

 

한국교회가 성장했을 때는 언제였고, 왜 성장했는지? 쇠락하기 시작한 때는 대략 언제부터였으며, 그 원인을 무엇으로 분석하는지? 다시 말해 왜 한국인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지그 원인이나 이유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놓고서는 위기라고 한다. 도무지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다!

 

제법 오래 전, 모 신학대학교에서는 총장선임 문제로 학생들이 데모했다. 그러나 웃기지 않은가? 총장인사문제에 뭐 하러 학생이 관심 가져야 하는가?

 

또 모 신학대학교에서는 교수들의 분쟁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일의 연장으로 학생들 중 일부는 단식도 하고, 폭행까지 했다. 이거 이상하지 않은가?

 

교수 둘의 싸움은 그냥 교수들끼리 열심히 싸우면 된다! 이는 학생들의 일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

 

학업, 취업, 입학 등 각 가지의 과제들로 골치인 학생들이 무엇 때문에 교수들의 사적(私的)문제에까지 신경 쓰리오!

 

심지어는 그런 일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까지 운운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런 일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까지 들먹여야 하겠는가!

 

교수들이 더 부자들일 텐데, 아직 사회로 진출도 못한 신학생들이 신학교수들의 일까지 도와주어야 할 만큼 여유로운가! 대단한 신학생들 아니겠는가!

 

이제는 교수님들도 학생들 좀 신경 써 줄 수 없겠는가?

 

추상적으로 말고, 실질적으로...

 

누구처럼 너거 아버지한테 물어 봐라!”고 하지 말고, 좀 더 신경 써 줄 생각은 없을까?

 

추상적으로 툭 툭 던지듯 하지 말고, 좀 더 알아보고, 깊게 대화하여, 그나마 학생들이 좀 더 만족할 만한 상담을 할 수 있도록 해 줄 생각들은 없을까?

 

학생들에게 지시어 쓰듯, 명령어 쓰듯, 뭘 잘 안다는 듯이 훈수 두듯 하지 말고, 진짜로 그들의 아픔(고민)에 조금이라도 공감하여, 좀 더 책임성 있게 할 생각들은 없으신가!

 

어느 철학자에게 들었다. 나는 그래도 그 교수님은 양심적이셨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생이 대학원에서 철학을 하고 싶다며, 철학교수를 찾았다. 그러자, 그 교수 왈: “, 돈 있냐?”

학생: 아뇨, 없습니다!

교수: 그런데 왜 철학을 하느냐?

학생: 철학이 좋아서입니다.

교수: 철학해서 돈 안 되는 거 알지? 난 책임 못 진다!

학생: ,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대화는 비교적 양심적이다!

 

한 학생은 학벌 열등감 때문에 도무지 그 학교에 적응을 못하였다. 그래서 그 학생의 어머니가 모 교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 교수와 학생이 상담을 했는데, 몇 년 뒤, 교수에게 한통의 편지가 왔다:

 

교수님, 여기 프랑스에요! 교수님의 말씀 듣고, (힘을 얻었습니다?) 여기 프랑스 모 학교에 입학했는데, 새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사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소원들을 모르기도 하다. 단지 무언가 답답하다는 것 외에는 달리 아는 게 없다. 어쩌면 머릿속의 생각들이 얽힌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일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명료한 언어를 쓸 수 없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질문 할 능력도 없다. 그 질문에 응답해주어도 실은 답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상담이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훌륭한 스승은 다르다: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산파의 역할을 하듯, 대화법을 통해, 답을 찾아가도록 많이 돕는다.

 

다시 교회의 문제로 가 보자;

 

이게 문제라든 둥, 저게 문제라는 둥 하는 주장들은 몹시 추상적이며, 어떤 경우에는 주관적이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밝히려면; 무엇보다도 연구의 방법 및 조사방법이 나와야 한다. 가능하면, 가설을 세우고 접근해도 좋다.

 

왜 교회의 문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가?

 

그냥 추상적으로 툭 툭 던지듯 하는 말씀들은 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물론 학자도 설교할 때는 툭 툭 던지듯이, 선언하듯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연구할 때는 달라야 한다.

 

툭 툭 던지듯, 선언하듯 하는 주장들은 학문이 아니며, 그 책임성에 있어서도 신뢰도가 낮을 뿐만 아니라 동료 학자들에게 동의를 얻기에도 좋지 않다!

 

어떤 신학생이 진로문제로 신학교수를 찾았다고 생각해보자;

 

신대원을 가라는 둥, 목회를 해보라는 둥, 부모님과 상의하라는 둥 하는 요청들은 근본적으로 무책임하다!

 

왜냐하면 신학생의 진로상담은 성직(聖職)에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냥 신학 그 자체를 즐기는 것과 목양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의 신학 책을 보니, 그런 신학공부는 중산층 귀부인들의 취미생활 내지 교양 생활로서는 괜찮을 듯 했는데, 목양은 많이 다르다!

 

결국 칼 바르트가 주장 한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다!”를 실행하려면, 무언가 신학자들의 고뇌가 필요할 듯하다.

 

특이하게도 한국은 크리스텐돔이 아니며, 교회의 역사도 길지 않다. 그래서 단지 신학이라는 이상한 분야의 연구만으로는 많이 미흡한 편이다.

 

사회과학이나 경제학의 도움들을 받아야 한다. 특히 현지조사가 필요하다.

 

릴리어스 호튼이 쓴 L. H. Underwood,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는 차라리 인류학적 민족지에 가깝다. 또한 호머 B. 헐버트는 한국학에도 도움을 줄 만한 전문적 연구영역이 있다.

 

, 초기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외국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현지이해를 나름대로는 많이 한 편이다.

 

그런데 한국의 신학자들이 한국교회의 현지조사조차도 충실하게 하지 않고서, 무엇들을 발성한다면, 이는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신학생들은 고달픈 사람들이다. 가난한 학생들도 더러 있다. 그렇다면 누가 도와야 하겠는가? 당연히 교수들이 학생들을 도와야지, 학생들에게 교수들이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염치없지 않겠는가?

 

어디처럼 교수들의 싸움 때문에 학생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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