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소고

장신대를 찾은 아가씨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4/21 [03:25]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소고

장신대를 찾은 아가씨

공헌배 | 입력 : 2019/04/21 [03:25]

 

2016년 겨울,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이 가결됐다. 어디에선가는 환호성을, 어디에선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누군가는 탄핵기념이라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시물을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 결과가 반가운 듯 여기는 사람들이 있더라!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의견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조금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사태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어떠해야할까?

 

박근혜 대통령은 교적이 불확실하다. 어쩌면 교인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치리할 수 없다. 그러면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도해야 한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녀에게도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정직성과 윤리적 성화에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세금장이 삭개오를 찾으셨다. 그 당시의 세금장이들은 친()로마파로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배척당하던 밉상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예수께서 그 밉상 받던 삭개오의 집을 찾은 까닭이 무엇일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제시한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다음과 같이 결단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19:8).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새로운 존재가 됐다. 이걸 신학 용어로 거듭났다고(중생) 했던가? 성경은 이것을 복음(유앙게리온)으로 기록했다(1:1 “Arke Tou Euangerriou Iesu Kristou”). 즉 예수를 만난 자는 변한다. 다른 인격으로 변하며, 다른 행위의 실천가가 되며, 다른 믿음의 소유자가 되고, 다른 소망의 추구자가 된다. 이게 성경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복음(Iesu Kristou)을 박근혜 여사에게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와 같은 복음은 박근혜 여사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다. 물론 믿고 말고는 그들의 선택이겠지만 전할 의무는 있다.

 

과거의 그 사태를 회귀해보자, 박근혜 여사는 아가씨 때, 장로회 신학대학교를 찾아갔다. 그런데 모 교수의 회고를 따르면, 정치바람을 탄 장신대는 그 박근혜 아가씨를 쫓아냈다.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사실 그 당시의 사태에서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그녀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물어야지, 그의 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가혹하다. 딸과 아버지는 동일한 인격체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손가락 질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검사가 되고, 판사가 되어, 소견들을 내놓는다. 물론 당연히 박 대통령에게 과실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분 스스로도 사과를 하지 않았겠는가?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 시대의 기준으로 하면, 삭개오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은 만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나셨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라면, 삭개오와 같은 인간들은 상종 못할 사람들로 분류됐을 듯하다. 삭개오의 비밀을 캐내고, 삭개오의 비리를 폭로하면 아마도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잘 했다고 여겼을 듯하다.

 

잘못을 덮어주자는 뜻이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사법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 더군다나 공직자의 죄질은 무겁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무얼 해야 하겠는가?

 

빅또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 1. (종달새 꼬제뜨)를 보니, 신학적 주제가 적지 않게 다루어지더라, 영화 <레미제라블>과는 달리, 이 책의 원작은 마치 신학 책인가?라고 할 만큼 신학적으로 여겨지더라, 사람들은 인문학 고전으로 생각하던데, 실은 신학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책에는 장발장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죄수이기도 했고, 신분 높은 사람이기도 했다. 동일한 인물이지만 상당한 역할 상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발장을 분노하게 했던 요인은 뭐였고, 장발장을 변화시킨 요인은 뭐였는가?

 

사실 사회는 장발장에게 빵을 훔친 죄 값을 치르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장발장은 빵 훔친 댓가를 충분할 정도로 치렀다. 그러나 그 사회의 법은 장발장을 교화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장발장으로 하여금 더 큰 분노를 낳게 했다. 장발장을 변화 시킨 힘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수십 년 전의 장신대는 어떤 신학적 해석을 했는가?

 

장신대가 신학교로서 일반 사회의 법대나 일반대의 정치학과와는 어떤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신학자들에게서 적지 않은 의견들을 들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도대체 저 훌륭하신 신학자 분들이 가진 신학적 해석의 기준이 무엇인가? 왜 저분들의 발성들은 신문 사설이나 검찰이나 기자나 정치가들이 말하는 것들과 동일한 발성처럼 들리는가? 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변화(회개)시키지 않으셨는가?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달랐던 점 아니었는가?

 

물론 변화되지 않고, 끝까지 악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치리했다. 신약성경에도 출교가 나온다. 그러나 회개하고 변화될 영혼에 대해서는 전도할 수 있어야 한다. 치리하다가 힘에 밀려, 쫓겨나고, 매장되어 목사 면직이 되더라도 그게 목사에게 주어진 임무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영혼이 있다면 그 가련한 영혼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 목사에게는 그 복음을 전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목사와 신학자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은 것 아닐까? 다시 말해 수십 년 전에 놓쳐버린 기회를 다시 주고 싶은 것 아닐까?

 

그 당시의 신학자들은 전도에 실패하여, 최 아무개에게로 한 영혼을 빼앗겼다. 영적 스킬이 부족하여, 그녀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하여, 최 아무개에게로 넘겨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을 반복하고 싶은가? 여전히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수 십 년 전의 성공하지 못한 그 미숙한 방식의 스킬로 그녀를 대하고 싶은가!

 

대남 공비 중에 김신조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김신조에게 시집가겠다고 한, 남한의 한 여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제정신 아니라고 했을 듯하다. 그리고 결혼 후, 그 부부는 교회를 나갔다. 오늘날의 김신조는 달리 평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의 김신조는 교회를 통해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한다.

 

성경은 인간 존재의 고독함과 인간 존재자들의 변화(회개)를 가르치지 않는가?

 

우리는 현재 복음의 그 능력을 신뢰할 수 없단 말인가?

 

더러 복음 전한다고 가기는 했는데, 영적 스킬이 부족하여 최 아무개에게 도둑맞을 만큼 어설퍼야 하겠는가? 좀 더 야무지고, 똑똑하며, 뛰어난 영성가가 정말 우리 주변에는 없단 말인가? 마치 엘리야나 나단이나 이사야와 같은 영성가들이 없단 말인가?

 

아니, 무엇보다도 그를 예수님 앞으로 안내할 전도자가 없단 말인가!

 

<경건과 학문>을 보면, ‘주객이 전도 된 사과라는 글이 있다.

 

어쩌면 장신대도 역사 앞에서 사과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슨 사과를 하냐구?

 

자신들의 학교를 찾은, 부모 잃은 젊은 아가씨를 잘 돌보지 못한 죄를 사과해야 한다.

 

영혼을 돌본다(젤조르게)’는 뜻을 가진 목회라는 차원에서 볼 때, 그 당시의 신학생들과 신학교수들이 좀 더 따뜻하게 그녀를 대하고, 그녀에게 목양적 돌봄이나 신학교육을 충족할 만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단지 그게 그녀 하나 만의 문제였는가? 그 당시 신학교육이나 전도 또는 목양적 돌봄에 있어, 그다지 기대할 만 하지 못했던 그 신학대학교는 수 십 년이 지난, 2016년 겨울, 한 여 대통령을 탄핵해야 할 만큼 큰 문제로 번지지 않았는가?

 

경악할 일은, 장신대는 사과가 아니라 심각하게 그녀를 비판했다는 데 있다.

 

즉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도 잘 모르는 듯 느껴진다.

 

다시 말해 수 십 년 전에는 그녀를 쫓아냈고, 수 십 년이 지난 후에는 그녀에게 강력하게 비판했다.

 

과연 이것이 신학적 정의인가?

 

그대들의 신학 선생님들은 그렇게 가르쳤는가?

 

 

정유라의 입학부정이 그리도 못마땅했는가?

 

그럼 장신대가 오랫동안 해왔던 신학대학원의 입시행정은 어떠했는가?

 

들쭉날쭉했던 신대원 모집정원, 수십 명에서 수백 명씩 더 받았던 신대원 입시, 어느 분의 희사로 넓은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데도 불구하고 결코 서울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서울주의(?)

 

과연 그대들이 예수님을 운운하고, 정의를 말해도 될 만큼 당당해도 되는가?

 

과연 장신대는 한국 사회 앞에 사과 할 일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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