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문제점들

신라로 역습(逆襲)하자!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4/12 [21:25]

고조선의 문제점들

신라로 역습(逆襲)하자!

공헌배 | 입력 : 2019/04/12 [21:25]

 

고조선은 기록들이 충분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사가(正史家)로 꼽히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제법 길게 언급하고 있어, 기록적으로도 그 존재가 있다.

 

사마천은 고조선과의 동시대 사람인데, 그는 특별히 위만조선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편이다.

 

우선 일부 살펴보자:

 

<史記> 卷 百十五, 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왕(朝鮮王) (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遼東) 외요(外徼)에 소속시켰는데, ()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동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蠻夷) 및 옛 연·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를 따르면, 첫째, 위만조선의 이라는 사람은 중국의 연()나라로부터 고조선으로 망명했는데, 천 여 명을 모아, 북상투(魋結蠻)모양의 헤어스타일에, 고조선 식 의복차림으로 고조선으로 망명했다.

 

둘째, 연나라 출신인 위만은 자신이 왕이 됐다. 즉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뺐다.

 

이 대목에 대해 고려의 일연은 쫓겨난 고조선 왕이 남쪽의 마한으로 갔다고 했는데, 실지로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 내용이 없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대목에서 위만의 손자 대에 이르러 한()나라와 끈질기게 전쟁하다 결국 망했고, 그 뒤에 한()의 군현들을 두었는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그 행정구역 명칭이 정확하게 기입되어 있지 않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는 군현이 소위 낙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낙랑군의 위치가 평안도인가, 요동인가, 요서인가를 두고 심하게 다투듯 했는데, 가장 많은 물증들이 쏟아 진 곳은 평안도였다. 그래서 그곳을 낙랑군으로 보는 견해들이 강하다.

 

바로 이 낙랑 이야기가 학계에서 주목 받는다.

 

그러나 과연 현대의 평안도 사람들이 고대 낙랑군 사람들의 후손들인가? 전혀 아니다!

 

낙랑은 고구려에게 망하였고, 특히 고구려의 멸망이후, 평안도 지역은 변화가 심하였다.

 

보통의 학설대로 하면, 후기신라의 통일은 매우 불완전한 영토 통일로써, 고구려의 영토들을 거의 다 잃어버린 통일이었다.

 

그러나 고려 왕건의 북진정책으로 평안도 지역들을 수복했지만 몽고에게 빼앗겼으며, 공민 왕 이후에 일부 수복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북진정책으로 46진들을 세움으로써 다시 영토가 확장되어 소위 오늘날의 경계선(두만강과 압록강)을 만들었다.

 

따라서 대동강의 이북지역은 상당한 변화들을 겪었다.

 

이와 같은 변화상에 연관 된 글이 <경건과 학문>에 있다: “북한 사람들”(2019. 3. 15).

 

그래서 기원전의 사태에만 집중하듯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고조선과 낙랑군에 집중해야 하는가?

 

혹시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 고조선에 집착하는가?

 

그럼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은 어떻게 정해졌는가?

 

해동(海東)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檀君), 기자(箕子), 위만(衛滿)이 바로 그들이다.(중략) 지금 천자(天子: 明太祖)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체 받아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 무왕이 기자에게 명하던 것으로 전하에게 명한 것이리니, 이름이 이미 바르고 말이 이미 순조롭게 된 것이다.(중략)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鄭道傳, <三峰集>, 卷之十三, 朝鮮經國典 上, “國號.”;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삼봉집>, 2. (서울: , 1977), 232-233).

 

명나라의 황제가 조선에게 하사했다! 즉 혁명한 이성계 패거리들의 자주적으로 정한 이름으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자체에 이미 노예적 의지가 엿보인다.

 

이를 따르면, 고조선이란 이름은 그다지 자랑스런 이름이 아니다. 노예의지를 가진 지식인 패거리들이, 이성계라는 무관의 힘을 빌려 세운 나라인데다, 역사관 자체도 노예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에 과연 조선이란 국호를 자랑스러워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요약하면, 첫째, 명나라 태조가 정해 준 이름이며, 둘째, 고조선은 중국으로부터 망명한 사람들이 세웠다.

 

일제 식민사관 못지않을 식민사관이 바로 여기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일본만 탓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반대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살펴보자:

 

금 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은 금 나라의 실록인 <금사(金史)>에서는 금 나라 시조는 그 이름이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나왔다(金之始祖(후략) <金史> 本紀第一 世紀)”고 합니다.(중략) <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금 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이란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女眞酋長乃新羅人(후략) 洪皓 <松漠紀聞>)”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료인 <고려사(高麗史)>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1. (서울: 해냄출판사, 2006), 356-357).

 

1778년 청() 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황명(皇命)으로 펴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금 나라의 시조 합부[哈富: 또는 힘보(函普)]께서는 원래 고려에서 오셨다. <통고(通考)><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시조께서는 본래 신라로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대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와 금()의 역사를 보면 이 두 나라가 종종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중략)”라고 합니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1, 357).

 

경주 김씨는 후에 금태조(아골타)-후금태조(누르하치)로 이어져 중국을 정벌하여 쥬신 천하를 열게 됩니다. 금 나라와 청 나라 황실(淸皇室)은 유난히 정신적으로 신라(新羅)와 가까웠습니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1, 370-371).

 

 

그렇다면 결국 전금(前金)을 세운 완안의 추장 아골타는 신라의 후손이라는 뜻이 된다. 즉 신라를 이은 또 하나의 제국이 금()나라가 될 수도 있을 법한 주장이다.

 

다시 말해 중세기에 북송(北宋)을 오랫동안 지배하였던 그 대제국이 신라의 후손에 의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고백적으로도 그 금나라가 신라를 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후금(後金)이다. 후금의 추장은 아이신죠로 누루하치인데, 바로 그 후금이 후에는 청()이 된다. 바로 그 청이 마침내 만리장성을 넘어 지나()200년 이상이나 지배하였다.

 

적어도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청나라는 건재하였다. 그리고 신해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비록 일본의 도움을 얻기는 하였지만 마지막 황제이자 초대황제인 아이신죠로 푸이는 건재하였다.

 

쉽게 말하면, 신라사를 잘 활용해도 우리는 중국지배의 웅장한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조선인가?

 

굳이 고조선운운하면서, 낙랑을 거론하고, 그래서 한()나라의 식민지 연구에 몰두해야 하겠는가?

 

물론 학술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신라도 있지 않은가? 왜 여진족과 신라의 후손들 그리고 금()나라의 역사는 등한 시 하는가?

 

다시 말해 낙랑 때문에 수치스런 역사만 말하지 말고, 여진족 때문에 웅장했던 역사를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즉 기록을 따를 때, 고조선은 우리에게 수치를 안겨주지만 신라는 중국인들에게 수치를 안겨준다.

 

평양에 있는 낙랑 유적지구들을 보면, 중국 계 유물들의 수많은 증거들이 쏟아지지만 반대로 청나라(Shilla)를 생각하면, 여진족이 중국을 지배한 수많은 증거들이 쏟아진다.

 

평안도(소위 낙랑 유적지구)에는 중국 식 화폐들과 중국 식 화장실 시설, 중국 식 토기들이 발굴됐지만 북경을 가면, 중국인들(漢族)이 얼마나 오랫동안 신라()에게 지배 받았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

 

왜 우리는 그동안 고조선 연구에 몰입했을까?

 

이에 못지않게 여진족과 신라연구에도 몰입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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