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의 분열사들

일제시대의 장로파 교회는 단일 교파였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4/07 [20:41]

총회의 분열사들

일제시대의 장로파 교회는 단일 교파였다!

공헌배 | 입력 : 2019/04/07 [20:41]

한국교회에서의 특성들 중 하나는 분열이다.

 

한국인들은 분열 잘 하는 민족일까?

 

서양사에서도 종교개혁은 분파교회로의 진행으로 해석된다.

 

아놀드 죠셉 토인비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지방 국가와 종파(분파)교회로의 이행으로 여겼다.

 

좀 심하게 말하면, 교황권이 추락하면서 각 지방의 국가들이 저마다 힘겨루기를 해야 할 사태로 진입하게 된다. 물론 독일은 오랫동안 통일되지 못했으며, 30년 전쟁의 직접적 피해지역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독일인구가 급감할 정도로 피해가 컸고, 로마에서 실행했을 면벌부 판매에 있어서도 독일은 직접적 피해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0년 전쟁,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위그노, 고이센 등은 그 시대를 잘 설명해 준 단어들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무엇인가를 하려면, 엄청난 고통들이 따른다.

 

조선 말()을 보자: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읽어 본 사람들은 좀 감을 잡겠는데, ‘도전과 응전이다. 조선말에는 적지 않은 사태들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도전해왔다. 어쩌면 오늘날의 사람들이 겪을 아노미와는 비교하기 힘들만한 소위 개벽(開闢)’으로 불릴만한 시대였다.

 

여기서 분열이 생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갈등(대원군과 명성황후), 친러파와 친일 파, 친청(親淸), 친미(親美) 등의 갈등들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저마다 자신들의 소견들을 놓고, 왈가왈부 했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했다. 별로 좋은 수가 없었다. 견디면서 인내하면서 이겨내는 수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을 만큼 특이했다.

 

바로 그 시기에 개신교가 꽃을 피웠다. 미국북장로회, 미국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 등으로부터 선교가 실행됐다. 4개의 선교회로부터 복음이 들어왔지만 조선예수교장로회는 단 하나의 교파만이 존재했었다. 물론 신학교도 한 개 뿐이었다.

 

만주의 봉천신학교, 한반도의 평양신학교, 동경의 일본신학교 등 주로 이랬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평양신학교로 가면 된다. 거기서 목사후보자들의 훈련이 실행됐다.

 

최초의 노회는 평양에서 창립됐으며(1907), 최초의 총회도 평양에서 창립됐다(1912). 1930년대의 총회 회의록에는 내몽골이란 단어가 나왔으며, 산서동노회, 남만노회, 간도동노회 등을 비롯한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노회들이 있었다.

 

분단도 없고, 교회의 분열도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일 정도였다. 교회의 지평들은 쭉 쭉 쭉 뻗어나가던 시대와 같이 느껴진다.

 

교파 간의 갈등을 없애기 위해 선교지도 분할 됐다. 감리교와의 마찰을 없애기 위해, 선교지도 분할했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의 신조(12신조)에는 감리교적 요소도 아주 조금 있다고는 하는데, 별로 동의할 만 하지는 않다. 12신조의 뿌리는 인도장로파 교회의 신조이며, 이는 아시아교회의 신조들 중 상당히 에큐메니컬적이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자유주의적 신조라는 말까지도 했다.

 

후대의 사람들은 1930년대 하면, 신사참배의 우상이라는 단어에 익숙한데, 그것은 단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930년대는 국가의 지평과 교회의 지평들이 매우 확장되던 놀라운 전성기였다.

 

(: China)나라를 섬기던 조선 사람들이, 그 차이나(支那)를 사정없이 짓밟으면서, 최치원의 기록을 따르면; 옛 백제나 옛 고구려의 지배영역으로도 여겨 질 만 한 그런 지역들로 진출했었다(황군에 자원하여 입대하면 그런 일도 가능했을 듯하다).

 

조선시대 때에 차이나를 섬겼던 그 조선인들이 현대에는 일본을 섬기면서 일본에게 헌납하여, 중국을 짓밟던 아주 특이한 시대였다. 물론 여자들까지(군위안부) 요구한 것은 너무 심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분열은 생각하기 힘들다. 교회도 통일, 국가는 더 더욱 통일됐으며, 지평은 지속적으로 넓혀져 갔다!

 

이 시기의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질서 잡힌 교회로 여길 수 있다. 신학교는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고, 교파는 하나이며, 교회들도 매뉴얼에 충실했던 편이다. 교회 안에서 별로 싸울 일 없을 정도로 외형적으로는 질서 잡힌 교파와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토록 전성기(?)를 맞이했던 그 놀라운 1930년대에 약간의 분열의 조짐이 있었는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훗날 분열의 도화선이 될 법 했을 만한 조짐이 나타났던 셈이었다.

 

그것은 지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자유주의 논쟁! 바로 이거였다.

 

소위 뭘 좀 배웠다는 거다! 이게 문제다! 임마누엘 칸트가 잘 아는 것이겠지만 어설픈 지식은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설픈 것은 자주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와 비슷하게도 어설픈 지식인들도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옛 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미국은 유럽, 특히 도이치란트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을 꽃 피운 곳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도이치란트라고 해 봐야, 식민지의 면적도 작고, 국가는 수많은 지방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 도이치란트가 좀 신경 썼던 학문이 신학이었던 모양이다!

 

예를 들면; 고고학은 영국이 주도적이었다. 산업혁명도 영국이 주도했다. 프랑스는 식민지가 매우 넓었기 때문에, 역시 박물관이나 고고학에도 좀 신경 써야 했다.

 

그럼 도이치란트는 뭘 해야 하나? 도대체 무슨 학문으로 타 국가에 비해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지?

 

에라이 모르겠다. 기독교를 파헤치자! 기독교 해부학! 일명 자유주의 신학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도이치란트가 개척하기에는 상당히 괜찮은 분야가 신학이었던 모양이다.

 

실증주의, 랑케, 프랑스 등이 유명했다면, 도이치란트는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 제대로 실행했다(물론 알버트 쉬바이처는 그의 책에서 영국 계의 학자도 소개했다).

 

프란츠 오버벸, 브레데, 쉴라이에르마허, 아돌프 폰 하르낙 등. 영국이나 프랑스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변별력 있을 학문이 필요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해부학이다! 이름 하여 자유주의 신학이다!

 

반면 그 시절, 미국은 판이(判異)했다. 미국이 도이치란트의 신학에 종속 될 이유는 없었다. 역사는 짧지만 토머스 제퍼슨 만 하더라도 고고유적지를 발굴한 사람이다. 그리고 원주민들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굳이 기독교해부학에 신경 쓸 이유는 별로 없었다. 차라리 언어학이나 인류학이나 민속학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 어메리카 등은 언어학이나 고고학을 발전시켜야 했다. 당연히 미국은 교육학 분야가 아주 훌륭하다.

 

이는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도이치란트야 식민지가 적으니까 기독교해부학으로라도 파먹어야 했겠지만 미국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 미국이 자유주의 신학에 선두주자가 되지 못했다고 하여, 비판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미국은 그냥 미국다움으로도 엄청난 나라다!

 

이와 같은 미국으로부터 파송 된 내한개신교 선교사들은 교육 분야가 뛰어났다. 그들의 선조들이 원주민들과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에서도 적응성이 뛰어났다. 즉 내한개신교 선교사들은 무엇들을 해야 조선인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지, 어떻게 교육해야 조선인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칠 수 있는지를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막, 기독교가 싹트기 시작한 사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왠말인가? 어처구니 없다. 물론 이는 해프닝으로 끝났던 셈이다. 그리고는 원래 없던 단어가 하나 더 추가 됐다. 그 단어는 정확무오 한이다. 즉 원래의 12신조에는 없던 단어였는데, 1930년대에 첨가 됐다. 이는 신조사적으로 성경의 무오류나 권위를 보강하기에 더 좋은 변화였다.

 

그러게 그냥 두시지, 뭐 하러 건드려 더 손해 보는가?

 

그래서 일제시대 때까지의 조선예수교 장로회는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질서 잡힌, 분열 없는 교회였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다! 쉽게 말하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망했다!

 

왜냐하면 일제시대 때까지 확장되던 그 국가사회와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일본의 패전으로 순식간에 분단되면서 북쪽에는 무신론에 근거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조선예수교장로회의 본부는 이북에 있었는데, 그 북쪽을 거점들로 하여, 쭉 쭉 뻗어가던 시스템이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순식간에 망했다. 다시 말해 주요거점들(본부들)을 잃었다.

 

분단 이후 선교사들은 손을 떼기 시작한다.

 

이제 조선도 독립하고, 주권들도 돌려줄 테니, 당신들 스스로 세우시오!

 

그러나 이게 결정적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인들이나 지도자들에게는 그 만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손을 뗀다는 것은 교파의 분열을 각오해야 할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심각한 교파의 분열들이 실행됐다. 물론 교파가 분열되면, 신학교도 많아지고, 따라서 신학교 교수님들의 일자리들도 많아진다. (참으로 좋은 일이지요^^)

 

, 이제 주도권은 한국인들에게로 넘어왔다: 이게 불행한 실행들이었다!

 

주도권을 잡으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럼 묻자!: 어떤 실력들이 있는 데?

 

원전들에 대한 부실한 자료들과 연구 사태에서 대중들의 편익들을 따라, 헌법개정작업들이 실행됐다.

 

가령, 모 교파의 목사청빙 제한규정 제286항을 보자; 이 조항은 왜 만들었는가? 그 조항이 들어와야 할 기준이 무엇인가?: 여론, 감리교의 사례, 모 신학교수의 글, 어느 목사님들의 주장, 신학생들의 집단행동 등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개정안을 실행하는 방법은 다수결! 이거다!

 

잘 생각해보시라: 위와 같은 기준들이 헌법 개정의 기준들로써 적합하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가 빠진 셈인데, 첫째, 칼뱅주의 교회정치의 신학이나 교회론 그리고 전통의 신조들이나 서양교회의 사례들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둘째, 해 당사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을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 이는 무조건 다수결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강력한 폭력이며, 집단 따돌림이다.

 

셋째, 신학자들이 뭘 준비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 인류학자가 언론에 대해 쓴 글을 언젠가 책에서 읽었다. 그 인류학자 왈: 모 신문기사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더라! 왜냐하면 그 인류학자는 그 현장을 다녀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문기사도 못 믿는데, 역사의 기록들을 어떻게 다 믿겠는가!

 

잘 생각해보시라! 헌법 개정을 관념적으로만 하면 안 된다. 법의 조문하나 바꾼다고 그게 다 되는 게 아니다! 그 법조문을 바꾸기 위해서는 현장조사가 있어야 한다.

 

인류학자들에게 좀 배우시길 바란다!

 

1950년대에 WCC가입 찬/반 논쟁이 총회에서 실행됐다. 이는 안 해도 될 논쟁이다. 왜냐하면 WCC에 가입했다고 하여, 한국교회가 어느 날 갑자기 WCC체질로 바뀔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에게는 필요할지 몰라도 지()교회들에게 미칠 영향들은 생각 못하는가!

 

2차 세계 대전 후의 한국교회의 사태에 대해 쓴 모 신학자의 글을 일부 인용 한다:

 

이번에 한국교회의 초청을 받고, 선교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태국교회의 대표로 장로교 총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중략) 한국 교인들은 참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총회에 참석해 한국교회를 돌아보는 가운데 여러 가지로 좋은 면이 많았지만 이 두 가지는 분명히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중략) 예수 믿는 사람들이, 특히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제가 참여한 대전 장로교 총회에서 제 눈으로 직접 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에서 밤새워 철야 기도를 하던 사람들이 다음 날 아침에 모여 죽어라 싸우고, 일부에서는 혈서를 쓰기까지 하니 내 생각에 저렇게 싸우려면 무엇 하러 철야기도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안교성, “한국장로교 총회 100주년 회고,” <長老敎會神學> 9 (2012. 9): 38).

 

이와 같은 싸움의 중심에 지식인들이 서 있었다.

 

요약 한다: 1930년대에 약간의 지식적 충돌이 있었지만 해프닝처럼 끝났고, 이차대전 후, 주권을 이양 받은 대한민국 교계의 지식인들은 저마다 의견들을 냈는데, 이는 충돌 그 자체였다.

 

헌법 개정의 작업들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아무리 그럴법한 의견들일지라도 현장조사와 적지 않은 숙고들 그리고 전통의 신학들을 고려해야 한다.

 

만일 신학자들이 미숙하다면, 그 교파의 교회들에게 또 다시 고통들을 줄 수 있다.

 

왜 신학생들이 현장까지 가서, 시위들 하듯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럴 신분들이 아니다!

 

어떤 신학생들은 우린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럼 어떻게 배웠는데? 당신들의 선생님들은 어떤 분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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