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연구는 왜 어려운가?

합리적 사고(思考) 때문이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3/19 [18:28]

고조선 연구는 왜 어려운가?

합리적 사고(思考) 때문이다

공헌배 | 입력 : 2019/03/19 [18:28]

 

오래 전 필자는 모 대학교의 사학과에서 고대사를 담당하던 교수를 만난 적 있다.

 

내가 고조선 연구에 관심 있다고 하자, 그분 왈: “고조선은 안 돼! 자료가 없는데 무얼로 연구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00교수님은 했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그가 왈: “북한의 리지린을 아시오? 00교수는 리지린을 베꼈소!”라는 황당한 주장을 들었다.

 

물론 훗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는 오해였다. 이상하리 만치 윤00박사는 엉뚱하게도 표절누명을 쓴 학자가 됐다. 이에 대해 오해를 풀어주는 책은 아래와 같다:

 

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서울: 책으로 보는 세상, 2012).

김상태,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서울: 책으로 보는 세상, 2013).

 

그래서 늦게나마 윤00을 변호해 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한국사학계에서는 고조선 연구에 대해 어려움을 겪었을까?

 

이에 대해 사람들은 일제식민사학의 영향 때문으로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그다지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제가 끝난 게 언제인데, 아직도 일제 타령인가?

 

무조건 일제만 탓한다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 될 수도 있다.

 

만일 일제가 역사를 왜곡했다면, 무엇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밝혀야지, 모든 책임을 일제에게로만 돌리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소위 우리가 식민사학으로 배웠던 그 일본의 학자들도 파벌이 있었고, 그들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다투었다.

 

                                  자료제공: 정인성 교수

▲     © 경건과 학문

 

▲     © 경건과 학문

 

▲     © 경건과 학문

 

초기에 평양 유적을 발굴한 일본인 일리트 학자는 고구려 유적이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도리이 류조가 반박했는데, 그것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고 하여, 난리났다즉 처음부터 역사왜곡하려고 발굴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자신의 학문실력으로 고구려 유적이라 했는데, 만주를 탐방했던 류조에 의해 반박 당했다.

 

그 뒤부터 평양유적에 대한 다른 가능성이 제기됐고, 점점 더 낙랑 유적 화 됐다. 물론 그 당시에는 조선인 고고학자가 없는 셈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의 일리트들은 조선인들을 고고학자로 키우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조금 늦긴 했지만 조선인으로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유학한 고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도유호다(1930년대). 그러나 조선고고학은 여전히 일본인들에게 의존한 점이 컸다.

 

그러다 이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광복이 주어졌지만 그렇다고 하여, 졸지에 한국고고학이 성립되는 게 아니다.

 

그럼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보고 된 고조선 관련 보고서를 번역하여 옮긴다:

 

                                      자료제공: 정인성 교수

▲     © 경건과 학문

 

▲     © 경건과 학문

 

▲     © 경건과 학문

 

▲     © 경건과 학문

 

이를 요약하면: 첫째, <삼국유사>에서는 <위서>의 기록을 옮겼다고 하는데, 위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즉 근거가 부족하다.

 

둘째, 기자의 망명지를 평양으로 볼 만한 근거가 없고, 위만의 근거지를 평양으로 볼 근거도 없다.

 

셋째, 고고학적 검증을 거쳤을 때, 비교적 년대가 명백해지는 것은 한군현(漢郡縣)시기이다.

 

그러나 이게 불만족스러우면, 광복 이후 한국인들이 더 잘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한 예로 박정희 정부시절, 경주의 황남대총을 발굴하려 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하기에는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해보자고 하여, 큰 무덤은 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작은 무덤하나를 파보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작은 무덤에서도 온갖 놀라운 유물들이 쏟아졌다. 바로 그게 천마총이다.

 

사실 일제시대 때 일본에서 평양(낙랑)유적지구를 많이 파헤친 것은 사실이다.

 

                                  자료제공: 정인성 교수

▲     © 경건과 학문

 

▲     © 경건과 학문

 

▲     © 경건과 학문

 

이를 두고 왜곡했느니 마느니 하는데, 평양의 고분들은 매우 많다(3천기가 넘는다고 한다).

 

              자료제공: 우명하

▲     © 경건과 학문

 

▲     © 경건과 학문

 

▲     © 경건과 학문

 

다시 말해 일제시대 때 파헤친 것은 조족지혈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일본 고고학자들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발굴하면 된다.

 

그러나 그게 마음먹은 대로 다 된다는 보증이 없다.

 

특이하게도 대한민국의 사학계에서도 제법 오랫동안 고조선 연구는 별로 실행되지 않았던 경향이 있었다.

 

이를 두고 굳이 일제의 영향으로 변명하기에는 무언가 궁색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한국사학계가 일본으로부터 지시받는 곳은 아니지 않겠는가?

 

고조선 연구의 어려움으로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댄다:

 

첫째, 기록 자료들이 충분하지 않다. 둘째, 고고학적 고증이 쉽지 않다. 셋째, 고조선의 영토들이 대한민국보다는 북한이나 요동반도 쪽으로 비정되어, 연구활동이 쉽지 않다.

 

그러다 최근에는 또 놀라운 주장이 제기 됐다.

 

과거보다 기술력이 발전했다. 그것은 AMS(연대 측정)인데, 이 기술력이 놀랍도록 진보했다. 그래서 소위 낙랑유물로 여겨지는 평양 출토물로 연대측정 했는데, 그 편년이 기존의 역사적 주장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즉 보통 학계에서는 기록에 근거하여, 고조선의 멸망 년대를 BC 108년 경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근 다시 조사해보니, 그 유물의 편년이 훨씬 더 오래 된 것이라고 한다.

 

현대 고고학은 미세고고학으로서 자연과학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사람들은 학계를 비판할 때 흔히 이병도와 친일사학을 운운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핑계를 댄다면, 이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이병도도 시대의 한계를 가진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

 

이병도던, 리지린이던, 00이던 그분들은 자신의 시대에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 사람들이다.

 

보통 고조선 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을 거론 한다: (西)북한과 요동지역 또는 요서지역, 미송리형 토기, 북방 식(탁자 식)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이다.

 

그러나 북방 식 고인돌이라 하지만 한반도의 남부지역(전라도)에도 나왔다. 또 그런 종류의 동검들이 강원도 춘천에서도 출토됐다.

 

그럼 춘천지역이 과거의 고조선인가? 이런 주장은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학자들이 좀 조심스럽게 있으면, 다른 곳에서는 난리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고조선 연구는 영토를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쪽이 더 유리하다. 즉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고, 만주가 독립 된 국가로 존재하고 있어야 우리로서는 연구하기가 월등하게 수월하다는 뜻이다.

 

결국 이는 정치적 문제에 연관된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아주 냉정해져서 객관적으로 연구하자고 한다.

 

그런 게 가능한가!

  • 도배방지 이미지

신학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