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람들

역사학 만으로는 충분한 조명이 힘들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3/15 [13:25]

북한 사람들

역사학 만으로는 충분한 조명이 힘들다!

공헌배 | 입력 : 2019/03/15 [13:25]

 

북한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일까?(인류학의 관점)

 

이에 대한 역사학계의 논문들이 더러 있다. 일반적 견해로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후기신라의 통일은 대동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 및 함경남도 지방의 일부까지 통일한, 즉 고구려의 영토를 거의 다 잃어버린 불완전한 영토통일이었다(하지만 최치원의 글을 따르면 달리 추정될만한 문장도 있다).

 

둘째, 고려 때에는 왕건의 북진 정책으로 하여,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지만 몽고에 의해 빼앗겼으며, 공민왕 이후부터 수복하기 시작했다.

 

셋째, 조선시대 세종에서 세조에 이르기까지 주로 4군 육진들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이 영토부분에 대한 해석이 좀 논란이다. 이를테면 백두산 정계비라든가 간도 영토설 등을 고려할 때 그러한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대로 하면 대략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다(이게 정확하게 조선의 경계가 맞는지는 여전히 연구 과제이다).

 

그렇다면 대략적으로 할 때 대동강의 이북 지역부터는 빼앗겼다가 수복했다가 하면서 영토의 변동을 준 지역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를 기울려 볼 것은 인종(人種)이다.

 

조선이 수복/확장한 지역에 어떤 사람들이 살게 되었는가이다. 그 사람들을 일컬어 흔히 이북사람들로 부른다. 물론 황해도도 이북이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조선시대에 북진정책에 의해 개척된 이북 사람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그 사람들은 남쪽에서 사민(徙民: 이사해서 옮겨진) 된 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주로 한반도의 남쪽 지역 사람들 및 제주도 사람들의 일부를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게 학계의 설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북 사람들은 한반도 사람들로서 사민 된 자들이라는 뜻인데, 이게 그다지 납득 될 만하지 않다. 이걸 확인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은 유전자 풀을 통한 인종분석을 해보면 답이 나올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그런 방법도 있겠지만 좀 다른 방면에서의 검토가 필요하다. 전에 알려진 논문들에 의하면 사민정책은 지역민들의 반발들이 심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즉 남쪽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려 하지 않았던 경향이 강하였으며, 또한 개척지인데다 접경지역이기도 하여, 여진족들과의 전투준비까지도 해야 할 사태였을 텐데, 국민들의 호응을 얻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그러나 전에 연구된 자료에 의하면 사민정책은 서북면(평안도)보다는 동북면(함경도) 쪽이 더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동북면 쪽의 정착률이 더 높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장하면 다 설명될까? 천만에 말씀이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인구수(人口數)이다. 통계를 참고해 보자!

 

조선 중기 숙종 46(1720) 평안도의 인구수는 국민의 15.8%(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3.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97), 23). 반면 함경도는 7.5%(같은 책, 23).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사민정책은 함경도 쪽이 평안도 쪽보다 더 성공적이었다고 했는데, 인구는 평안도 쪽이 월등하게 높게 나온다.

 

그렇다면 면적이 평안도가 더 넓은가? 아니다. 면적은 함경도 쪽이 더 넓다. 그렇다면 생활환경이 평안도가 함경도보다 나은가?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분명 연구 논문들에 의하면 생활환경은 함경도가 더 나았고, 사민정책의 정착률이 함경도 쪽이 더 높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함경도보다도 평안도 쪽의 인구분포율이 월등하게 높게 나올까? 사실 조선시대에는 양강도나 자강도와 같은 행정구역들이 없었다. 양강도와 자강도는 광복 이후 북한에서 만든 구역이다. 원래 없었던 행정구역이었다. 그래서 평안도나 함경도는 조선 8도 중, 그 면적이 가장 넓은 곳들이다. 경상도보다도 더 넓다.

 

인구를 좀 더 살펴보자, 충청도는 14.3%, 황해도는 6.7%, 경상도는 23.8%, 전라도는 16.2%, 황해도 6.7%(같은 책, 23).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 보자, 충청도보다도 평안도의 인구비율이 더 높다. 그리고 황해도보다는 평안도가 월등하게 높게 나온다.

 

다시 말해 사민(徙民)되어 개척된 지역의 인구가 기존 지역의 인구수보다 더 높게 나온다. 학술적으로 주장한 바를 따르면, 남쪽지역의 사람들을 이주시켰다고 하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남쪽지역인 전라도의 인구와 맞먹을 만큼 평안도의 인구가 많지 않은가? 물론 인구밀도가 높은 전라도보다 평안도가 약간 적게 나왔다.

 

그런데 기존의 학설에 의하면 평안도 쪽은 사민정책의 실패지역 아닌가?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인구가 살았는가? 굳이 면적으로 해도 평안도보다는 함경도가 더 넓다. 그런데 인구는 평안도 쪽이 함경도보다 월등하게 많다.

 

그래서 기존의 학설들과 인구 통계를 비교하면 일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평안도 지역의 인구수는 남쪽 지역 사람들의 사민정책으로 채워진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물론 평안도 지역으로도 남쪽 지역의 사람들 일부가 이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율은 높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강제에 의해 개척지로 간다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상당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다. 실지로 연구 자료를 따르면, 이주정책에 대한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즉 고향을 떠나 개척지로 가지 않으려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평안도의 인구수 통계가 저토록 높게 나왔는가?

 

이는 남쪽 지방 사람들에 의한 사민정책으로는 설명되기 힘들다.

 

그렇다면 다른 가설 하나를 세워보자, “평안도 쪽은 북쪽에서 유입된 사람들로 구성됐다.이런 가설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당시 북쪽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는 역사적으로도 유추가 가능한데, 아마도 여진족(女眞族), 즉 만주족(滿洲族)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렇다면 이걸 체질인류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유전자 풀을 비교하면 된다.

 

추측해 보면, 조선 시대에는 평안도 쪽으로 많은 수의 북방인(女眞族)들이 유입됐을 것이다. 즉 유입 되어 정착한 듯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조선에 문화적으로 동화된 듯하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평안도 쪽 출신인데도 더러 남방계의 형질들이 나타났거나 중국계의 혼혈 내지 중국계의 형질처럼 여겨질 사람들도 제법 많이 있다.

 

왜 그럴까?

 

설마 한반도의 남부 지역 사람들과 북방인들이 혼혈이라도 된 걸까? 그런데 이 가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평안도 쪽으로의 사민정책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혼혈 계 내지 중국계 식의 형질도 나타났는가? 좀 유추해 볼 수 있다.

 

임진년으로부터 정유년으로 이어진 7년 전쟁 때 명(: China)나라의 군인들이 조선으로 파병 왔다. 와서는 적지 않게 평안도 쪽 여인들을 겁탈했다. 이리되면 다소 간의 혼혈도 가능하다. 이와 같은 일들을 당하지 않으려면,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잘 해야 하는데, 조선 시대의 지도자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시 초점을 잡아 보자, 만일 평안도 쪽으로 유입된 사람들이 적지 않게 북방인(女眞族: 滿洲族)들이라면 그들의 집단 무의식에는 한반도의 남부 지방 사람들과는 다른 이데아가 형성될 수도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정책은 어땠을까? 제꼈다.

 

다시 말해 평안도는 소외지역이었다. 조선시대의 학문과 정치의 중심지들은 영남학파의 거점인 경상도 쪽과 기호학파의 거점인 그런 지역들이었다. 즉 평안도나 함경도 쪽은 논외다. 평안도나 함경도는 정치나 권력과는 별 상관없는 지역들이었다.

 

그러다가 이 판세에 큰 변화가 나타났는데, 일제시대였다.

 

우선 신채호 선생만 하더라도 신복룡으로부터 마지막 고구려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만큼 일제강점기에는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있었다. 내한(來韓)개신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평안도를 지목했다.

 

그리고 일본은 북쪽 지방들을 본격적으로 개발했다. 수력발전소나 공장지대도 이북에 세워졌다. 즉 조선시대 때 소외지역이었던 북한이 새로운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바로 이것이 일제시대 패러다임이다.

 

그런데 왜 몰락했을까? 그 시대에는 만주와 한반도가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예수교 장로회 안에 남만노회나 간도동노회와 같은 노회들도 있었다. 복음(福音)은 만주(滿洲)로부터 왔으며, 사람들의 관심은 북쪽에 있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최초의 노회와 최초의 총회는 모두 평양에서 창립되었다. 신학교도 평양에 있었다(그 당시에는 평양신학교, 만주의 봉천신학교 그리고 동경의 일본신학교에서 주로 공부했다. 즉 장신대나 총신대나 고신대 같은 학교들은 있지도 않았다).

 

그랬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무슨 문제가 생겨, 8일 가량 만에 분단되면서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기 위하여 20세기에만도 40 여년의 공을 들였는데, 그게 8일 만에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금나라의 추장이요, 금나라를 세운 사람은 완안부의 아골타였는데, 그는 신라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금을 세운 추장은 아이신죠로 누루하치인데, 여기서 아이신죠로(愛新覺羅)’신라(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 황족(皇族)은 신라 출신, 즉 경주 김()씨의 후손들이다. 그러니까 여진족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숙신족(肅愼族)은 우리 민족이다. 그들의 나라 만주제국(滿洲帝國)20세기에는 한반도와 통일되다시피 했었는데, 왜 굳이 몰락해야 했을까?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이나 단재 신채호의 고구려적 소망이나 언더우드의 정책을 생각한다면 잘 됐어야 했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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