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설교는 어땠을까?

지루한 설교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2/20 [22:21]

칼빈의 설교는 어땠을까?

지루한 설교들

공헌배 | 입력 : 2019/02/20 [22:21]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종종 듣는 말 가운데 한 가지가 있다. “ㅇㅇㅇ 목사님은 설교를 참 잘 하셔!” “ㅇㅇㅇ 목사님의 말씀은 은혜가 된다라는 식의 주장이다.

 

더러 설교대회라는 것도 하고, 누군가는 설교에 대해 평가도 한다. 그리고 설교로 선까지 봐 가며 목사의 청빙사안을 결정한다.

 

<긍정의 힘>을 쓴 미국의 모 목사의 설교를 CBS TV를 통해 들은 적 있다. 참 놀라운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도 저런 식으로 설교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교회 역시 그러한 미국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설교를 잘 한다는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당한 평가가 될 수 있을까?

 

그럼 존 칼빈은 설교대회에서 몇 등을 했을 것 같은가? 칼빈의 설교라고 소개하지 말고 그냥 그 설교문을 그대로 읽어준다면 청중은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 설문조사를 하고 싶을 지경이다. 특히 미국에서 설교학 전공하고 온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전도사가 설교를 하는 데 장로가 자꾸 눈치를 주더라는 경험담을 들은 적 있다.

 

즉 설교가 길어지니까 그만 멈추라는 뜻으로 손목시계를 자꾸 가리키더라는 거였다. 순간 그 전도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 했다. 사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장로의 권한이 아니다. 그리고 2 스위스 신앙고백을 감안한다면 회중의 기도는 짧아야 하지만 교역자의 설교에 대해서는 그런 조항이 없다. 물론 오늘날의 교회들은 대체로 설교시간이 일정한 편이다.

 

그래서 칼빈의 설교를 참고해 봤다. 칼빈의 모든 설교를 다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여러 편의 설교문들을 참고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 칼빈의 설교는 오늘날의 일상적 낮 예배 설교보다 긴 것 같다. 책으로 해서 짧은 것은 13쪽 정도이고, 긴 것은 23쪽이다. 대략 20쪽에서 왔다 갔다 한다. 20쪽짜리 설교문을 이 뉴스의 게시판에 올리면 어느 정도일 것 같은가?

 

2) 칼빈의 설교가 길기 때문에 듣기에 힘들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별로 재미가 없다. 그 당시의 청중은 그러한 설교에 매료 되었을지 모르겠는데, 미국의 모 목사가 하던 설교나 한국 식 설교에 익숙한 사람들이 칼빈의 설교를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만약 어느 용감한 목사가 칼빈의 설교를 예배 시간에 그대로 읽는다면 장로들은 긴급 당회를 소집하자고 해 놓고, 그 목사에게 면박 줄지도 모를 일이다.

 

3) 칼빈 시대의 예배는 오늘날 우리가 겪는 것과는 또 다른 특성이 있다. 좀 쉽게 설명한다면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것이다. 우선 칼빈은 오르간의 사용을 금지 시켰다고 한다. 오르간이야 말로 예배의 분위기를 압도할 수 있는 도구인데, 칼빈은 반대했다. 또 성당의 구조가 갖는 웅장함이나 묘미를 통하여서도 사람들을 끌어들인다거나 압도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칼빈은 바로 그 메리트(?)를 없애버렸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드럼을 사용하지도 않았을 테고, 오늘날의 교회들에서 하듯이 복음송을 불러주며, 빽댄서들을 세워놓고 흔들어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시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교회를 다녔을까?

 

그러니까 오늘날의 목양자들이 설교를 길게 해도 교인들은 이의를 제기하면 안 된다. 설교가 재미없거나 자기감정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설교가 아니라 성서 본문으로 깊이 들어가 성서의 세계로 인도하는 설교라면 바로 그 설교가 명 설교이다.

 

추측건대, 단지 흥미위주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칼빈파의 예배는 별 재미가 없었을 것 같다. 천주교처럼 예전을 강화한 것도 아니고, 급진파들처럼 회중의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말씀으로 들어간다. 무미건조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만약 이것이 칼빈파의 행태이고, 16세기 스위스 교회의 행태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교회의 수적인 부흥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교인수가 줄어들어 무능한 목사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될까?

 

오늘날의 한국과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칼빈과 같이 설교하고, 칼빈과 같이 목양한다면 배척받을지도 모른다. 인기 없는 설교가가 될지도 모른다. 분명 칼빈의 설교는 훌륭하지만 인기는 없을지도 모른다.

 

칼빈은 목회에 성공한 사람일까?

 

바울은 목회에 성공한 사람일까?

 

그 판단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J.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 by L. Nixon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0).

 

이 책으로 스터디를 한 사람의 말을 빌리면, 번역하기가 난해했다고 한다.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데에 있어서 말을 구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이다. 또한 이 설교문들이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도 그 스터디 그룹의 공통된 견해 중 한 가지였다. 오히려 교리문답의 번역보다 더 어려웠던 책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그렇다면 불어판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 편이 나을는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라고 여쭈었더니, 그것은 허세라고 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위의 이 책이 번역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소위 불붙는 듯한 설교들은 청교도의 전통에서 찾는 것이 좋을 듯하다(마틴 로이드 존스였나?: 20세기의 명 설교가로 <설교와 설교자>의 저자).

 

옛날의 청교도는 전통의 관습들이나 틀에 박힌 요소들을 깨고, 역동성 있는 설교들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청교도의 설교들도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

 

결국 설교들은 시대와 청중과 함께 가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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