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설교가 살기 위해서는 삶이 살아야 한다.

황규학 | 기사입력 2019/02/20 [12:37]

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설교가 살기 위해서는 삶이 살아야 한다.

황규학 | 입력 : 2019/02/20 [12:37]

교회가 점점 시들해지는 것은 설교가 죽었기 때문이다. 1000여명 이상되는 교회와 그 이하의 교회를 가보면 일단 설교가 다르다. 교회도 식당같아서 사람이 많이 오는 곳은 무언가 있기 때문이다.   

 

한 목사는 요사이 같아서는 목회를 하기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어떤 신도가 자신의 아들을 데려와서 대학가도록 축복 기도를 해달라고 해서 기도를 해주었더니 그만 낙방했고, 감기든 환자가 와서 기도를 해달라고해서 안수기도를 해주었는데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경제가 어려운 사람이 와서 기도를 요구해서 해주었더니 얼마 안가서 파산되었다는 것이다. 축복기도할 때마다 망하는 쪽으로 가서 목사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     © 경건과 학문

 

어느 날은 80세 된 노인이 임종을 하게 되어 임종예배를 드려달라고 해서 주님나라 잘 갈 수 있도록 기도했는데 지금까지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사이는 신도들이 목사님이 능력있다고 기도요청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임종할머니를 위해 기도하여 건강해져서 신도들이 그나마 목사님의 능력을 인정하여 겨우 체면을 살렸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의 설교는 진솔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낸다. 부흥강사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능력, 현실적인 축복에 촛점이 되어있고, 그러한 현실을 설교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고 사람들을 인커리지 시킨다. 한 목사는 동방박사들 처럼 목숨을 각오하고 아기 예수를 예배하는 자세를 할 때, 헤롯의 박해를 피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마련해 주신다고 했다.
 
그래서 그 목사는 우리들도 진정으로 헌신적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자세를 취할 때, 하나님은 죽지않고 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마련해주신다는 것이다. 연두 새벽에 한 목사는 "새해 복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는데 새해가 되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해에 새로이 변할 때 복을 받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부흥강사들에 대한 네가티브한 면이 많았지만, 이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힘을 얻고 위로가 되고,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설교란 무엇이가? 설교란 성경말씀을 가감없이 청중에 쉽게 다가가도록 하는 것이며 청중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도구일 것이다. 그 설교는 많이 배웠다고 해서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설교학 교수나 박사라고 해서 잘 하는 것도 아니다. 명성교회와 주안교회 사건을 비교하면 설교학을 배운 적이 없는 김삼환목사는 장로교 최고의 교회로 성장시켰고, 설교학자가 있는 곳은 날로 신도들이 줄어들고 있다.    

 

신학이나 설교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목회자가 영감과 삶,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들에게 가게끔 하는 것이다. 테크닉과 유머, 목소리, 음성도 하나의 요소이지 메인은 아니다. 장로교 목사들의 설교는 대체로 능력이 없는데 문제가 된다. 설교는 있는데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교인들도 참회를 하거나 기적을 체험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미즈근한 신앙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목사라면 하늘나라를 삶이나 설교, 능력을 통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이제까지 교인들이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야 하며, 교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신비한 세계의 경험을 드러내 주어야 하고, 교인들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다수 교인들이 원하지 않으면 떠나는 모습도 보여주어야 한다. 노회와 총회정치를 끼고, 일부 장로들을 의존해서 계속 안주하려는 행태는 정치적 목사에 불과하다.

 

축구선수도 열심히 뛰다보면 가끔 골을 넣을 때가 있다. 잘해서 넣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뛰다보면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반드시 골을 넣을 수 있는 찬스가 생기는 것이다. 박지성처럼 말이다. 한 부흥강사처럼 신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주다보면 때로 기도와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경향이 있어도 하나님이 역사해서 실로암 물이 동할 때가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도구이다.

 

성경을 많이 풀이하거나 자신의 주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의 말씀을 보여주어야 한다. 명성교회, 치유하는 교회, 양곡교회, 큰 은혜교회, 든든한 교회, 한소망교회, 전주 동신교회 등은 사람들이 수천명씩 몰려든다. 가보면 올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세습으로 난타를 당하고 있는 명성교회도 토요 새벽예배, 수요예배, 저녁예배, 월요기도회 등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이유가 있다. 아마 광성교회 김창인목사같은 분이 길자연목사처럼 개척을 한다면 많은 신도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는 철저히 신앙적이고 영성적이며 윤리적이며 독서량이 풍부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신비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억대 연봉을 받고서는 하나님의 기적을 드러낼 수가 없다. 조용기 목사는 수십억의 연봉을 받은 이후 기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적어도 목사가 신앙적이 되기 위해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매일 기도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조용기, 곽선희, 김삼환, 김지철, 김홍도, 이영훈목사를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매일 기도하는 개척교회나 시골교회목사들을 부러워해야 할 것이다.

 

금과 은이 없으면 불편하고 삶이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이면으로는 하나님의 광야의 만나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금과 은이 내게 없거니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서라는 기도가 나와아 한다. 그러나 금과 은이 많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한국의 설교가 점점 중세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중세 신부들처럼 말씀이 없거나 성경의 본질로부터 너무 멀리 나갔다는 의미이다. 설교에 능력이 없다. 신도들이 참회하고 머리숙이는 능력, 감격하는 능력, 기적을 체험하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이 시대에 설교는 없는 줄도 모른다. 충분한 석의나 신학도 미비한 채 지나친 기복주의나 성장주의로 가고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가고 있다. 신학교도 영성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대부분 천주교영성을 배워왔다.
 
미국의 설교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엔터테인먼트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이러다보니 영성과 엔터테인먼트가 합해졌을 때 좋은 설교가 되며 청중들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김삼환목사의 설교는 항시 유머를 동반하면서 은혜로운 쪽으로 간다. 그래서 대교회 목회자들, 특히 텔레비전에 나오는 목회자들을 보면 말과 유머에 있어 능수능란하다. 미국의 M.Div(목회석사학)과정에서는 설교학 시간에 설교 전달에 있어서 강조점을 많이 둔다. 마이크를 조절하는 법, 음성의 강약, 시선, 유모어 등 청중을 끄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이 미국식의 설교방법이다.
 
미국 설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도 교회성장학 차원으로 기운 나머지 어느 정도의 영성과 입심, 지성, 유모어가 있는 설교는 청중들을 끄는 것이다. 요약하면 현대교회 성장을 일군 사람들은 영성과 입심을 능수능란하게 잘 조화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틈바귀에 역사성과 사회성이 끼어들어 가면 교회 성장은 어려운 것인지를 이들은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그것은 기장의 교회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성과 사회성을 경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칼빈은 "설교 없이 구원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차원까지 생각했는데, 남의 설교를 의존하는 것은 '연설만 남고 설교는 없는 것'이다. 특히 설교도용의 이야기가 빈번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시대가 점점 중세교회처럼 '설교의 없음'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세교회처럼 영권의 타락이다.
 
이처럼 '설교 없음'의 시대에 다행히 희망을 갖는 것은 그래도 역사의식이 있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며 경쟁이나 성공, 성장, 비대, 사대주의에 관심이 없고, '샌드백'인지 '새들백'인지 알지도 못하는 말없는 시골 목회자들이나 중소교회 목회자들이 아직도 양심적으로 의식을 갖고, 소신껏 설교하며, 기술과 유머는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지만, 조금 어눌하더라도 진심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교단이 양심적인 그들에 의하여 유지되는 줄도 모른다. 그들은 그늘진 곳에서 남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히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도들의 삶속에서 일어난 애환과 고난, 눈물 등 삶의 정황이 반영된 고백들이 그들의 설교의 자료이기 때문에, 구태여 인위적인 자료나 성장 성공신화에 기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게 말하는 변호사들과 같은 요란한 혀의 놀림은 그들과 상관이 없는 얘기이다.
 
이용도 목사는 설교단에서 한마디 설교도 않고 울기만 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회개 자복하며 눈물을 흘린 기록이 있고, 프란체스카는 전도하러 갔다가 아무 말도 않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설교를 다했다"고 제자들한테 말한 기록이 있고, 손양원 목사는 설교 도중 앉은뱅이가 갑자기 일어난 기록이 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말(설교)에는 졸하다"고 했다.
 
미장로교단 헌법은 "목사는 말씀과 성례전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G-6.0202)고 규정한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말씀에 부름받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성장과 성공, 사대주의, 영웅주의, 달변, 많은 예화, 테크닉이 세련된 설교에 중점을 두거나 남이 만들거나 해놓은 설교를 도용하여 십계명 중 8계명을 어기는 것보다, 우리 시대의 애환과 고통이 담긴 민초들의 삶을 설교 자료와 예화로 삼고, 사회성과 역사의식을 갖고 영감있는 성경의 메시지를 우리 시대와 우리 삶에 잘 적용하면 그것이 참 설교가 아닐까를 생각해야 한다. 정보의 홍수와 물질이 만연된 시대일수록 눈물과 행위의 설교, 양심의 설교, 민초들의 삶을 노래하는 고난과 애통의 설교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럴 경우 '설교는 있다'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식 성장주의를 경계하면서 우리식의 영성으로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세로 돌아가서, 목회자들이 청빈, 검소, 근면 절약을 하고, 자신의 입장보다는 신도들의 입장에 서고, 인간의 입장보다는 하나님의 입장에 설 때, 자신의 배를 채추려는 자세보다 신도들의 배를 채우려는 자세로 돌아설 때, 교회는 성장할 것이고, 설교를 살아 역동성있는 귀한 설교가 되어 지역과 사회, 국가를 움직이게 될 것이다.
 
목회자들은 가능한 한, 설교예화도 책을 통해서 하지 말고 자신이 만난 하나님의 체험을 예화로 쓸 때 보다 강력한 능력있는 설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다. 시대가 암울해갈수록 목회자들의 설교까지도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 교회에서 설교를 통하여 오병이어의 역사가 나타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심령이 니고데모나 수가성 여인처럼 변하고, 마가다락방의 성령이 임하고, 목회자의 삶이 십자가로 달려가는 자세를 취할 때, 부활의 영광은 동터오는 것이다. 시대가 자본주의로 치달을수록 열변이나 유모 등의 설교보다 자신의 삶을 토대로 한 설교가 요구되는 것이다. 삶이 청빈하고 검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난다.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설교가 살기 위해서는 삶이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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