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교회는 우상화하지 않는다

2018년 MBC의 PD수첩에 대한 단상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2/14 [22:45]

M교회는 우상화하지 않는다

2018년 MBC의 PD수첩에 대한 단상

공헌배 | 입력 : 2019/02/14 [22:45]

 

2018년 어느 날 MBC에서는 한국의 모 교회를 향해 충격적 보도를 했다.

 

몇 가지로 보도했는데, 그 중 하나가 우상화 작업에 관한 것이다.

 

이 보도 때문에 M교회는 마치 파렴치한 구성원들이 모인 것처럼 모욕당했다(단체에 대한 명예훼손).

 

그 중 하나를 꼽으면, 등신대이다. 즉 어느 목사님의 등신대나 그 교회의 역사관의 아주 작은 부분을 조명하면서 이게 마치 개인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라도 된 양 넌지시 던졌는데, 필자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몇 개로 예를 들어보자;

 

유럽에서는 칼뱅기념주화를 만들어 판매했다: 이게 칼뱅에 대한 우상화인가?

 

독일에 가면 루돌프 K. 불트만을 기념하는 불트만 로(불트만 스트라세)가 있다: 이게 불트만에 대한 우상화인가?

 

미국에 가면 에모리 대학교가 있다. 물론 에모리는 사람의 이름(목사의 이름)이다: 이게 개인에 대한 우상화인가?

 

미국에 가면 하버드대학교가 있다: 하버드 역시 목사다! 그럼 하버드대학교는 하버드 목사를 우상화하는 학교인가?

 

미국에 가면 듀크 대학교가 있다: 물론 듀크는 담배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럼 듀크대학교는 담배회사와 그 사장을 우상화 한 학교인가?

 

연세대학교에 가면 원일한 홀이 있다: 이는 내한 개신교 선교 2세에 대한 우상화인가?

 

등신대보다는 차라리 그 학교의 이름을 개인의 이름으로 하는 편이 훨씬 더 강력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등신대나 그 교회의 아주 작은 기념관은 우상화라고 하면서, 왜 연세대학교에 있는 언더우드 동상이나 장신대에 있는 언더우드 흉상은 우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 M교회의 목사가 듀크보다 덜 존경스러워서인가?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하신가?

 

그냥 그 교회 교인들의 문화나 목사님에 대한 존경의 표현방법 정도로 받아들이면 안 되겠는가? 굳이 그런 일을 두고 우상화라는 말까지 쓰고 싶은가?

그래서 나는 개혁교회의 목사론이라는 관점에서 약간의 조명을 해 보려 한다.

 

목사란 무엇인가? 목사(牧師)양 치는 스승이다.그리고 牧會(목회)’라는 말은 양을 치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목사라는 영어 단어 세 가지를 간추려 보면: ‘reverend’, ‘pastor’, ‘minister’이다. 이 뜻을 하나씩 살펴보자:

 

Reverend: 기독교 교회에서 목사의 이름 앞에 사용하는 존경하는 명칭, 즉 목사에 대한 존칭.

 

Pastor: 개신교회의 기독교 제사장.

 

Minister: 기독교 교회의 제사장.

 

이는 영영사전(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에서 옮겼다.

 

물론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그래서 라틴어를 좀 살펴보자:

 

Ministorium: verbi divini : 말씀의 종.

 

Pastores: 목자(牧者).

 

목사(牧師)를 종으로 쓸 수 있는 단어는 ‘ministorium’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종은 종인데, 인간들의 종이 아니라 말씀의 종이다. 흔히 목사에 대해 종으로 표기하는데, 이는 사람들을 위한 종이나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아니라 말씀의 종이다. 그리고 ‘apostle’이라는 뜻에서는 예수님의 종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편에서는 종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글성경에는 어디에 목사라는 단어가 나오는가?: 에베소서 411절이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poimenas’인데(쿠르트 알란드 사본), ‘poimen’은 목동, 목자, 양치는 사람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poimen’이라는 단어를 고유명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복수보통명사로 볼 것인가에 있다. 만일 이 단어를 복수보통명사로 쓰면, 이 단어는 직책에만 쓰이지는 않는다.

 

가령 구약에는 목자라는 단어나 개념이 여럿 있다. 목자(牧者)가 복수보통명사로 쓰이면, 목동, 양치기, 하나님, , 지도자 등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다. 그러나 고유명사처럼 제한하면 그 어떤 특정직이나 특정 대상에게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에베소서에서는 직책에 사용했다.이게 아주 특이하다. 가령, 예수님의 탄생기사에 나오는 목자들이라든가, 이스라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라든가, 구약에 쓰였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목자들: 제사장들, 예언자들, 재판관들 등)에 쓸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직책으로서의 목자(牧者)란 좀 의외이기는 하다. 에베소서 외에 다른 본문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그렇다면 개혁교회에서의 직책들은 성경과의 연속성인가 불연속성인가에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20181220일 예정연의 창립 총회 때 발제를 맡으신 소기천 교수님께서는 귀중한 발제를 해주셨다. 그러나 필자는 한 가지의 부연 설명을 하고 싶다.

 

그 날 소기천 교수님께서는 목자를 예로 들면서 목사배의 맨 아래에서 노를 젓는 끄트머리 종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목사는 낮아져야 할 듯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부분은 좀 더 넓게 보아야 한다.

 

목사가 종은 맞지만 만만한 종이 아니다. 예를 들면 고대사회에서 황제의 종은 신분이 높다.종이라고 하더라도 황제의 종은 상당한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비록 종일지라도 예수님의 종이라면 상당히 높은 종이다. 즉 만만하게 여기거나 막 다루어도 되는 그런 종류의 종들이 아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로 서신서들의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을 썼다. 다시 말해 바울은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위기이다. 즉 종은 종인데, 예수님의 종이기 때문에 자신은 정당하고, 권위 있음을 표현한 뜻이지, 종이라서 교인들이 짓밟아도 되는 그런 종은 전혀 아닌 듯하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종이었지만 백부장은 베드로를 만났을 때 납작 엎드렸다. 그래서 베드로 역시 만만한 종이 아니다.

 

그럼 이번에는 장 칼뱅의 의견을 들어보자:

 

첫째는 사도, 다음은 선지자, 셋째는 복음 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이다(4:11). 이 직분들 중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의 일상적 직분(ordinarium in ecclesia munus)이며, 앞의 세 가지 직분은 주님께서 그의 나라를 시작하실 때 세우셨으며 시대가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마다 다시 부활시키신다(라틴어 원본 번역판 기독교 강요, 4, 3, 4).

 

여기서 칼뱅은 성경시대에 쓰이다가 현()시대에는 중단 된 직책을 말했다. 즉 현시대까지 이어진 직책을 항존직으로 명명했고, 성경시대에 쓰이다가 중단 된 직책을 비()항존직으로 여긴다. 즉 목사와 교사(박사)는 항존직이지만 사도와 선지자는 항존직이 아니라는 칼뱅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제2 스코틀랜드 치리서(1578)에서는 어떻게 주장했을까?:

 

In the New Testament and time of the evangel, he has used the ministry of the apostles, prophets, evangelists, pastors, and doctors in the administration of the word; the eldership for good order and administration of discipline; the deaconship to have the care of the ecclesiastical goods(Andrew Melville, “The Second Book of Discipline (1578),” Chapter 2:5).

 

Some of these ecclesiastical functions are ordinary, and some extraordinary or temporary. There are three extraordinary functions: the office of the apostle, of the evangelist, and of the prophet, which are not perpetual, and now have ceased in the kirk of God, except when he pleased extraordinarily for a time to stir some of them up again. There are four ordinary functions or offices in the kirk of God: the office of the pastor, minister or bishop; the doctor; the presbyter or elder; and the deacon(Andrew Melville, “The Second Book of Discipline (1578),” Chapter 2:6).

 

보시다시피, 여기서의 ‘ordinary(상시직:常時職)’‘extraordinary(특정직)’에 상반(相反)된 개념이다. 신약시대에 있었던 특정직으로서의 ‘extraordinary’는 중단, 영속적이지 않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직무는 신약시대의 한시적 직무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이와는 다른, ‘상시직으로서의 ‘ordinary’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신약시대에 쓰이다가 중단 된 직책은 특정직이고, ()시대까지 이어진 직책을 상시직(항존직)으로 불렀다.

 

더 쉽게 설명하면: 마르틴 루터와는 달리, 성경을 통해 교회의 직책들을 새롭게 하려했다. 그런데 그 직책들의 원류를 굳이 칼뱅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틴 부처가 있기 때문이다: Martin Butzer, Von der waren Seelsorge und dem rechten Hirtendienst, 최윤배 옮김, <참된 목회학> (용인: 킹덤북스, 2014). 칼뱅보다 마틴 부처가 먼저였다. 그럼 이 원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칼뱅시대 제네바의 원리대로 하면 목양(ministry)4중직을 기본으로 한다(J. Calvin,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ed. J. K. S. Rei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59-66). 여기서의 4중직이란, ‘목사, 신학교수(박사), 장로, 집사이다. 마틴 부처의 목양 원리를 따라도 이와 같은 원리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Martin Butzer, Von der waren Seelsorge und dem rechten Hirtendienst, 최윤배 옮김, <참된 목회학> (용인: 킹덤북스, 2014) 참고). 그러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부처는 감독직도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마틴 부처는 평신도의 목양직을 인정하지 않은데 비해, 칼뱅은 평신도의 목양직 참여도 인정했다는 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즉 마틴 부처는 목사, 감독, 박사, 장로, 집사라는 직책들을 모두 목양직으로 하되, 평신도와는 구별되는 목양의 직인데 비해(즉 목사, 감독, 박사, 장로, 집사 등은 평신도가 아니다), 칼뱅은 장로와 집사를 평신도에게서 선출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마틴 부처의 방식으로 하면, 목사, 신학교수, 장로 집사가 모두 전문적 목양직이지만 칼뱅 식으로 하면, 목사와 신학교수는 평신도가 아니며, 장로와 집사는 평신도에게서 선출하는데 임기가 있는 임시직이었다. 즉 칼뱅시대의 방식으로 하면 장로와 집사는 임기 1년의 임시직이었고, 목사와 신학 교수는 임기제가 적용되지 않는 목양직이었으며, 평신도와는 구별되는 직책이었다. 그렇다면 목사와 장로는 동등한가? 그렇지는 않다.목사와 장로는 직책상으로 차이가 있다.

 

이 주제를 여기에서 길게 쓸 수는 없다. 만일 내가 대학교의 교수라면, 나의 제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에게 개혁교회의 목사론이라는 논문주제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공헌배가 옮긴(공헌배 역)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지침서(1645)에서는 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목사는 교회에서 상시적 직원인데, 복음의 시대에는 예언(설교)을 했다.

 

그의 직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도인데, 그의 양 무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입으로써(양 무리를 대신하여) 기도한다. 사도행전 62, 3, 4절과 2036절을 따르면, 설교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그의 몇 가지 직무로 제시된다. 장로로서의 직무는(여기서는 목사를 뜻한다) 환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사적(私的)으로 하더라도 각별한(특별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목사는 그의 직무를 공적으로 실행해야 하는데, 보다 더 많이 실행 할 의무가 있다.

 

둘째는 공적으로 성경을 읽어주는 것인데; 이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공적으로 말씀을 읽도록 맡기셨던 것이 증명되었다.

 

2. 복음의 종들에게는 말씀을 베푸는 막중한 직무가 주어졌을뿐만 아니라 다른 규례들로써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의 직무도 주어져 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이사야 6621, 마태복음 2334절이 있다. 거기서 우리의 구세주께서 신약의 직책자들에게 주셨던 옛날 교사들의 그 이름과 같이 그를 보내실 것이다.

 

이로 볼 때, 결론적으로 (도덕적 본성의 의무가 되는)성경을 공적으로 읽어주는 것은 목사의 직무에 속한다.

 

다음으로, 양 무리를 먹이는 것인데, 말씀을 설교하고, 그는 말씀을 따라 가르치며, 설득하고, 책망하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리교육이다. 하나님의 신탁(예언)의 첫 번째 원리들 또는 그리스도의 선언 그리고 (교리)문답식으로 가르치는 것인데, 이는 설교의 일부이다.

 

또 하나는 신비들(비밀)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성례를 집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에게 축복하고(민수기 6:23, 24, 25, 26; 계시록 1:4, 5와의 비교), (같은 축복들과 그들로부터 사람들에게 축복이 오는 것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특히 이사야 6621절에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이름들은 복음적 목사들이라는 의미로 복음의 시대(신약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런 까닭에 목사는 그 백성에게 축복하는 직무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

 

또한 목사는 목자로서 양 떼를 다스릴 권세를 갖는다(“The Form of Presbyterian Church-Government according to the Westminster Standards (1645),”; Edited by David W. Hall and Joseph H. Hall, Paradigms in Polity: Classic Readings in Reformed and Presbyterian Church Government,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와 비교).

 

이로 볼 때 목사를 종으로 여길만한 근거들은 충분하지 않다. 목사는 교인들을 다스릴 권세를 갖는다. 필자의 논문 일부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따르면 16세기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행해진 목양의 형태는 목사가 섬김의 종이라든가, 평신도의 역할이 만인 교역자론식으로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제네바의 행태를 따르면 목사는 치리자즉 통치자였으며, 판관(判官)이었다.

 

다시 말해 교인들을 다스리고 교육하는 사람이었지, 교인들을 섬기는 종이 아니었다. 당연히 공화정의 형태를 추구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그랬다. ‘목사(minister)’라는 말이 (servant)’이라는 의미를 가질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말씀을 위한 종이었지, ‘인간을 위한 종이 아니었다. 따라서 만인제사장론의 오용으로 인한 만인교역자론식의 이해는 옳지 않다(공헌배, “16세기 제네바의 목양방식을 통해 본 교역자의 위상: ‘교회의 규례들 (1541)’을 중심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29 (2011. 6): 146-147).

 

그래서 M교회에서 교인들이 목사님을 존경하는 행위들은 정당하다. 단지 그 존경심들 자체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사실 목사를 멸시하고, 모욕하는 교인들이 훨씬 더 좋지 않다. 칼뱅의 말을 들어보자:

 

: 교회들은 목사들의 치리를 따라야 합니까?

 

: ,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들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적 설교를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목사들을 경멸히 여기고, 목사들의 말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버리고 교회 공동체에서 신도들의 사귐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 목사들에게 한 번 가르침을 받으면 충분합니까? 아니면 계속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까?

 

: 만일 열심히 추구하여 목사들의 가르침을 항상 끈기 있게 지속하지 않는다면 시작하는 것이 의의(意義)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학도가 되어야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교회에 목사들을 임명하셨기 때문입니다(J. Calvin, “The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1545),” 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J. K. S. Reid e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130-131).

 

그래서 기본적으로 교인들은 목사들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물론 게 중에는 좋지 않거나 존경받기 힘든 목사들도 있다. 그러나 교리문답의 원리로는 목사님들을 존경하라는 것이 칼뱅의 지침이었다.

 

그래서 M교회가 담임목사 중심의 목양 원리나 담임목사를 존경하는 것은 본받을 만 하다.

 

굳이 그런 일을 두고 우상화 작업으로 폄하할 일이 아니다!

 

물론 목사님들이 모든 교인들의 구미를 맞출 수는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는 신뢰감(라뽀)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교인들이 목사를 미워하고 수시로 교역자들이 교회를 들락날락 하는 교회치고 좋은 교회 있던가!(교역자가 자주 바뀌는 교회 치고 좋은 교회 있던가!)

 

교회는 목사와 교인들 사이의 존경과 사랑과 신뢰감들이 있는 편이 정상이다.

 

이를 우상화로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연세대학교 이양호 교수님의 글을 옮기며 이글을 맺는다:

 

칼빈(J. Calvin)은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 속에 빛남으로 그의 종들을 통해 말씀할 때마다 마치 그가 우리와 대면해 가까이 있는 것처럼 그것에 의해 감동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입이 자기 입으로 간주되고 그들의 입술이 자기 입술로 간주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목사의 직임이야말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직임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많은 중요한 은사들 중에서 독특한 특권은 그가 사람들의 입과 혀를 자신을 위해 성별하고 그것들 안에서 자신의 음성을 울리게 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목사를 사용하는 것인가?

 

칼빈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의 사신으로 사용한 것은 우리 인간에 대한 존중을 선포한 것이다.

 

둘째, 우리 인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듣는 자들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 하신다면 지체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흙으로부터 나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아무 것도 낫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그의 사역에 순종을 보인다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입증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유대 속에 있을 때 상호 사랑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이양호, “종교개혁과 목회자상,” <연세목회자 신학세미나 강의집> 16 (1997. 6):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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