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신학에 대한 개혁신학적 고찰

장윤재 박사에 대한 단상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2/12 [21:41]

동물신학에 대한 개혁신학적 고찰

장윤재 박사에 대한 단상

공헌배 | 입력 : 2019/02/12 [21:41]

 https://www.youtube.com/watch?v=XFT9mLWid3Y

선사시대의 행태들을 유추한다면, 인간과 동물들과는 경쟁관계였다.

 

인간군집과 동물군집과는 먹거리들을 공유하기도 했고, 가뭄이나 기근이 들면, 두 군집들 모두 고통들을 겪었다.

 

우리는 단지 18세기 이후의 서유럽 패러다임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그렇지, 조선시대만 해도 호랑이에게 물려죽거나 이()때문에 고통당하던 사람들이었다.

 

인간에게 복종하여, 인간에게 고기들을 주는 동물들이나 인간들에게 길들여진 애완용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동물을 경쟁자들로 여기지 않을는지 모르겠는데, 실지로 동물들은 인간들에게 위협이었다.

 

현대 문명사회 가운데서도 농촌에 사는 이들은 오늘날에도 멧돼지나 노루, 고란이 등에 의해 곡식들을 도둑맞는다.

 

그러나 현대 문명사회에서의 승자는 인간들이다. 인간들은 동물들의 생활공간들을 옥죄고, 도로에서 차로 쳐 죽이므로 수많은 동물들이 교통사고로 죽으며, 개발이나 건설 등으로 인하여 그들의 공간들을 잃는 것이 다반사이다.

 

()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는 원자로를 터뜨렸고, 이로 인해 태평양조차도 오염됐다. 뿐만 아니라 플라스틱이라는 공산품들은 물고기들에게 고통을 준다.

 

다시 말해 인간문명은 동물만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적지 않은 위협이다. 오염 된 물고기들이 다시 인간들의 뱃속으로 들어간다. 오염 된 토양은 오염된 먹거리를 만들며, 그게 다시 인간들에게로 간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여길 수 있을까?

 

우선 단답형으로 말하면; 수백 년 전의 개혁신학은 이와 같은 주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 종교개혁자들은 환경오염이란 단어에 익숙하지 않을 시대의 사람들이었고, 산업혁명이나 공산품과 같은 단어들을 잘 모를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만 하더라도 과연 현대 문명사회를 예상 했을지 다시 찾아보아야 한다. 단지 모어는 인간들의 노동시간이 길지 않길 바랐을 듯하다. 그러나 실질적 패러다임은 버들런드 럿셀에게서 찾을 필요도 있는데, 그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썼고, 그의 주장을 따르면, 생산을 과학적으로 조직하면 인류는 노동시간을 하루 4시간으로 줄이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인간들의 탐욕은 결코 그런 사회의 구조로 만들지 않는다. 혹시 4차 산업혁명이 성공하면 가능할지 몰라도,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4차 산업 혁명이란 인간들의 일자리들을 기계가 빼앗는 혁명이다.

 

다시 개혁신학으로 초점을 잡자; 벨직 신앙고백(1561) 2조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방법으로 우주의 창조와 그 유지와 통치를 통한 것인데, 우주는 눈앞에 있는 가장 훌륭한 책과 같고, 많은 피조물들이 글자와 같아서 이것들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1:20)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우리가 명상하도록 인도한다고 한다.

 

즉 자연신학을 인정하는 듯도 하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조금 다르게 주장 한다:

 

자연의 빛과 창조의 섭리와 업적이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권능을 잘 드러내므로 사람이 핑계할 수 없게 되었으나 그것들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하나님과 그 뜻에 관한 지식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러 가지 경우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기의 뜻을 자기 교회에 선포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그 진리를 보다 잘 보존하며, 육의 부패와 사탄과 세상의 악에 대비하여 교회를 보다 더 확고하게 설립하고 안심시키기 위하여 그 진리를 전적으로 기록하여 두시기를 원하셨으니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한 책으로 삼으신 이유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던 종전의 방법들은 중지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

 

그래서 구원을 위한 계시는 성경이고, 자연은 일반계시처럼 읽힌다.

 

사실 20세기 최대의 쟁점이 자연신학 논쟁이다. 칼 바르트던 에밀 브룬너던 둘 다 계시의 접촉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꼽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계시의 인식능력문제다. 바르트는 인간들이 완전하게 타락했기 때문에 계시인식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고, 브룬너는 그래도 좀 남아 있어서 계시들을 인식할 능력들이 있다는 뜻이다. 계시인식능력이 없는데 설교를 어떻게 알아듣나?뭐 이런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 중요한 초점이 있는데, 자연이란 단어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이다. 에밀 브룬너가 쓴 자연이란 단어를 우리가 흔히 이해하듯 쓰는 그런 자연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이 논쟁은 신학적 변증의 문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에밀 브룬너의 주장을 들어보자:

 

역사적. 사회적 삶에서 지속되며 모든 윤리적 문제의 핵심을 이루는 모든 규례(ordinances)들 역시 이 보존의 은혜 속에 포함된다. 예를 들면,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결혼이나 국가에 관한 규례들은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중략)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자연적 삶의 현상을 설명하는 자연신학은 필요한 것이다. 결혼의 가능성과 실현의 욕구는 인간 본성에서 나온다. 또 결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중에서 실현되는 것이므로 창조주의 자연적 규례라고 할 수 있다.

(E. Brunner and K. Barth, <자연신학>, 김동건 옮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35-36).

 

이 주장은 신학이 결혼이나 국가 또는 자연적 삶에 대해 응답해야 함을 주장한 변증적 진술의 필요성을 언급한 말이다.

 

그래서 브룬너의 자연이란 단어를 명확하게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현 시대의 패러다임이 갖고 있는 주제를 신학적으로 응답할 필요는 있다. 적어도 칼뱅을 깊게 연구한 브룬너를 존중한다면 그런 셈이다.

 

그렇다면 동물신학이 가능한가?불가능할 것도 없다.

 

장윤재 박사님의 주장을 따르면, 인간들은 엄청나게 많은 동물들을 먹어치우고, 학대하면서 마치 나치와 같은 폭행들을 동물들에게 실행한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할만한 물리적 대안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는 인간들의 식습관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인구수를 줄여야 한다. 동물권을 위해 인간들의 편익을 포기해야 한다.이게 가능한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따르면, 인간이던 동물이던 모두 이기적이다. 다만 현대는 인간들이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월등한 승자이기 때문에 그 비율이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이를 어떻게 개혁신학에서 조명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분도 언급했듯이 알버트 쉬바이처의 생명에 대한 외경사상을 빌리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떤 점에 있어서 쉬바이처는 불교연구가이다:

 

A. Schweitzer, Indian Thought and Its Development. Translated by Mrs. C. E. B. Russell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36) 참고.

 

쉬바이처는 실지로 동물신학을 실천 했을 수도 있다. 현대 서양의학이 인간과 박테리아 또는 인간과 바이러스들과의 경쟁에 있다면, 이 점에 있어서 볼 때 쉬바이처는 이단아 일 수도 있다. 그가 의학박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몸 아프면 주사 맞고,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 그것이 식물이던 동물이던 먹어야 산다. 결국 인간은 자연에 대한 간섭행위를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윤택성이 결정된다. 인류는 선사시대 때부터 문명(도시사회)을 무기로 자연과의 경쟁에서 승자가 될 것인가 패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해왔다.

 

장윤재 박사나 쉬바이처 박사가 자연에게 관대하게 대한다고 하여, 자연이 인간을 봐 주지는 않는다. 자연은 인간들에 대해서도 엄혹하며 잔인하다(홍수, 재해, 지진 등).

 

다시 말해 인간이 동물을 사랑한다고 하여, 동물 또한 인간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보증은 없다. 단지 인간이 동물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그 힘 때문에 동물들이 인간에게 굴복하는 것이지, 동물들의 도덕성 때문에 인간이 보호받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애완용이다. 그러나 자연 계의 동물들 중 애완용은 소수의 종()이다. 다수의 종()들은 인간들의 양심과는 무관하다.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의지들이 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존재하는 것들은 의지들의 산물들이다. 이를 도킨스의 이론에 견준다면 DNA의 설계도를 따라 움직인다.

 

다행스럽게도 현재는 인간군집이 챔피언이다.

 

이것이 못마땅하신가?

 

인간은 의약품을 통해, 박테리아와의 경쟁을 극복했으며, 인간은 불의 발명으로 추위와의 경쟁도 극복했다. 또한 인간군집은 농경혁명을 일으킴으로 이동을 정착으로 바꾸었고, 인간군집은 건축술()을 익힘으로 자연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인류의 자취들 중 동물과의 경쟁력이 가장 약했던 시대는 구석기 시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우울했겠지만 동물들이 덜 우울했을 시기는 중세였다.

 

인간에게 암흑기가 동물들의 권익이 보호되던 시기였다.

 

항해술이 뒤처지고, 지리상의 발견이 없었으며, 대서양을 건널 수 없었을 때(Non Plus Ultra!) 어메리카의 원주민들과 남태평양의 생태계는 안전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유럽 대륙에 서식하던 박테리아들 또는 바이러스들을 어메리카로 이전함에 따라 어메리카의 인간(원주민) 생태계를 파괴했다.

 

그놈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지리상의 발견들이 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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