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신학에 대한 단상

장윤재 교수님의 컬럼을 읽고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2/12 [17:26]

동물신학에 대한 단상

장윤재 교수님의 컬럼을 읽고

공헌배 | 입력 : 2019/02/12 [17:26]

 

한국기독공보에 장윤재 교수님의 글이 게재 됐다: 동물에 대한 인간중심 관점 바꿔야(2019. 2. 11)

 

장윤재 박사님은 W.C.C.를 주제로 규모 있는 학회에서 논문발표도 하시고, 등재지에 핵 확산(?) 반대에 대한 논문도 게재하셨으며, 뉴욕 유니언 세미너리의 동문들 중에서도 인지도 있는 분인 듯하다.

 

이분은 근자에 들어, 외국 학자가 쓴 <동물신학의 탐구>를 번역도 하신 듯하며, 20154, 단해교회에서 열린 한국조직신학자 전국대회에서 푸줏간의 그리스도와 동물신학의 탐구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하셔서 흥미(?)를 끌기도 하셨다.

 

먼저 한국기독공보에 게시 된 글의 요지들을 살펴보자: 1. 인간들은 동물들을 학대한다. 2. 동물학대는 서구의 인간중심적 이분법적 철학에 기초한다. 3. 성경이 제시한 동물관은 동물을 먹거리로 여기거나 지배할 대상이 아니다.

 

좋은 주제이고, 흥미롭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인간들이 동물들을 학대한다. 이는 옳은 말이다.

 

인간들은 선사시대 때부터 동물이나 자연과 경쟁하며 살아왔고, 자연세계에 대해 간섭행위들을 하면서 살아왔다. 인간만큼 자연세계에 대해 심할 정도로 간섭할 수 있는 동물들은 없는 듯하다.

 

특히 인간은 도시(문명)사회를 만듦으로써 다른 어느 동물군집들보다도 자연과의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들을 누렸다.

 

마틴 하이덱거의 철학을 따르면, 인간문명 사회는 밤이며, 그 밤은 점점 더 깊어진다고 여겼다. 또한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인간사회의 문화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있어서 첨병과 같이 또는 그 문화사회를 몰락시킬 수 있는 무서운 무기를 문명으로 여긴 듯하다.

 

그리고 내 생각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백 여 년 전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모던적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에 있어서 장윤재 박사님께 약간의 딴죽을 걸려 한다: 첫째, 서구사회의 철학이 인간중심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옳고, 한편으로는 동의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장 자끄 루소는 <에밀>에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또한 서양철학자로 소개 된 쇼펜하우어는 힌두이즘에 적지 않게 매료됐으며, 마치 인도를 동경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에게 영향 받은 듯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이체 역시 인도를 좋아했던 것 같다.

 

니이체의 잠언들이나 선언들은 그 이전의 철학 패턴들을 박살내듯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해 짜아르투스트라는 유럽인이 아닌 듯하다(조로아스트를 뜻함). 물론 니이체는 형이상학을 박살내고,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근대 이전의 인간들은(세계관은) 죽었다라고 여긴 듯하다(훗날 마틴 하이덱거가 그리 해석한 듯함).

 

그래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이분법적으로 도식화 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이다.물론 그 게시물에서 장윤재 박사께서 굳이 철학이란 단어를 쓴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가 느껴진다.

 

그리고 철학이라는 것도 의미가 모호하다. 왜냐하면 무엇이 철학인지를 밝히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논문에 의하면 동양철학은 철학이 아니다라든가, 비트겐슈타인은 2천 년 서양철학들을 헛소리들로 만들었다라든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암살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마당인데, 뭐 굳이 동양/서양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둘째, 성경의 동물관은 단순하게 구별할 수 없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동물 언급구절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일일이 분석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부분은 패스한다.

 

나는 좀 다른 관점에서 주장하고 싶다.

 

생물학적이거나 고고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인간도 동물군집에 속한다. 다른 동물들 못지않게 인간들도 이동했다: 기후에 따라, 먹거리들에 따라, 전쟁 때문에 또는 경제적 여건들 등 여러 가지의 이유들 때문에 이동했었고, 자연과 경쟁하거나 자연에 대해 간섭행위들(농업, 목축업 등)을 하면서 살았다.

 

동물에 대한 대량살상은 문명사회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장윤재 박사께서는 서구철학 때문에 동물들이 학대라도 받는 듯 주장했는데 그렇지는 않다. 선사시대의 유적지구 중, 유네스코에 등록 된 문화유산으로 소위 버팔로 점프라는 곳이 있다.

 

▲     © 경건과 학문



북어메리카는 역사시대가 매우 늦은 편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이는 보기 나름이다. 어쨌던 북어메리카의 원주민들은 록키산맥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버팔로(소과 동물)들을 생계수단으로 활용했다. 즉 동물들을 대량으로 죽여, 먹거리로, 옷감으로, 천막 등으로 활용하여, 그 원주민들에게는 버팔로 자체가 생계수단이었다.

▲     © 경건과 학문

 

                자료제공: 마틴 베일

▲     © 경건과 학문

 

그래서 동물학대에 대한 동/서양 식 구분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도스또옙스키가 쓴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따르면, 수도원 원장인 조시마가 등장한다. 거기서 혹시 조시마 원장이 동물에 대해 했던 연설을 기억하는가?

 

장윤재 박사께서는 굳이 유기견만을 문제시 하는 분이 아니다. 특히 문제 삼을 것은 동물실험이다. 즉 생물학자들, 제약회사의 연구원들, 실험실의 흰 가운 입은 과학자들로 인한 동물학대는 매우 심각하다. 동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과학자들은 탁월한 고문기술자들로서, 가혹하게 동물들을 학대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예들을 들어보자: 인간들의 두통을 줄이기 위한 아스피린 제조를 위해 어느 정도의 쥐들이 희생 됐을까? 얼마나 많은 쥐들에게 암세포를 강제 이식시켜, 실험실에서 죽였을까? 000 박사는 몇 마리의 암소들에게서 몇 개 정도의 난자들을 빼앗아 갔을까라는 등의 질문들을 해 본다면, 인간들의 동물학대는 너무도 가혹하다.

 

결국 인간들의 편익 때문에 희생당한 동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듯하다.

 

그러나 그 장윤재 박사께서도 다소 놓친 부분이 있는데, 이는 인류학자들이다.

 

사실 동물과 친하게 지내거나 식용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마치 소들을 형제처럼 여길 정도로 동물들과 지내는 소수부족이 있다.

 

에반스 프리차드의 민족지 The Nuer를 따르면, 아프리카의 누어족은 농목경제에 기반한 부족으로서, 주로 소를 기르지만 식용을 목적으로 소를 기르거나 소들을 학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 20장에 나온 안식일 규정을 성경보다 더 잘 지키는 ()기독교 집단이 있다. 그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겠지만 주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출애굽기의 정신을 잘 지킬 듯하다. 즉 누어족은 동물을 먹기는 하지만 대량살육이나 학대가 아니다.

 

또한 티벳의 라다크 공동체는 문명사회의 패턴과는 다르다. 라다크 공동체는 자연친화적이다. 굳이 장 자끄 루소의 책을 읽지 않더라도 루소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셈이다.

 

또한 아누타 섬의 원주민들은 부모 잃은 아이들을 그 부족 공동체에서 돌본다. 그 섬의 주민들은 플라톤이 주장한 처자의 공유 철학을 배우지 않았지만 어쩌면 플라톤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셈이다.

 

그래서 장윤재 박사의 인상적 컬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의 사례는 들면서, 원주민 사회나 동방전승에 기초한 도스또옙스키나 서유럽의 <에밀>을 간과한 듯한 인상을 주어, 다소 단순도식화 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와 같은 주장이 지나치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장윤재 박사님은 왠지 인류학자들에 비해 사회과학적 구체성이나 현장성이 약한 듯한 인상도 준다.

 

즉 그냥 동물들을 생각해보자!’라는 당위적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동물사회가 어떤 식인지를, 기자나 인류학자나 사회과학자들과 같이 현장으로 뛰어들어 좀 더 구체적이고 전문적 연구가 실행 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장윤재 박사의 좀 더 발전 된 연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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