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지 않은 신학자들

답답했던 신학자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2/10 [20:16]

책임지지 않은 신학자들

답답했던 신학자들

공헌배 | 입력 : 2019/02/10 [20:16]

 

나는 지방대 출신이다.내 동기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도 들어갔고, 국립경북대학교에도 들어갔지만 목사의 아들인 나는 유독 학벌이 볼품없다. 아버지의 체면을 구기기에 더 없이 좋은 아들이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점심식사를 해야 했는데, 나는 결국 식사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동기들에 비해 대입 시험결과가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온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경험이 딱 두 개 있었는데, 첫째는 대학교를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없었던 것과 둘째는 20대 때 죽도록 짝사랑했던 여인에게 거절당했던 일이다.

 

남들이 보면 아무 것도 잃은 게 없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세상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삶에 낙이 없었다. 죽을 수도 없었고, 살 희망도 없었다.

 

20대 때의 내 주관적 경험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설령, 신이 존재 하더라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분 같았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지도 않으시고, 나의 무의식의 소원을 들어주시지도 않는 무관심 한 분, 그 분이 바로 내가 관습적으로 믿어왔던 신이었다.내가 20대 때에, 신이 그래도 나를 도우셨다는 걸 경험한 적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군()생활에서였다. 군을 전역한 후, 나는 점점 더 신에게 실망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지방신학교였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만히 절망할 만 했고, 충분히 자퇴할 만 했다. 나는 내가 학교에 다닐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할만한 희망은 다른 학교로의 편입 후, 대학원을 좋은 곳으로 가는 거였다.

 

그런데 더 불행스러웠던 것은 이 좋은 제도조차도 나에게는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실지로 그랬다. 3학년 때 담임교수를 찾아가 진로상담을 해 보고 싶었는데, 그 분은 바빴는지 별 대답 없이 아버지 하고 의논하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웃기지도 않을 소리였다. 아버지에게 답이 있었으면 당연히 아버지와 상담하지 뭐 하러 교수를 찾겠는가? 나는 제도조차도 몰라 그토록 방황했다. 그 당시의 나는 일반대학교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 내지 두려움 또는 계산되지 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일반대학교가 그리 크게 보이지 않지만 그 당시의 나는 도저히 내가 우러러 보기 힘든 곳이 일반대학교였다. 어떤 교수는 신학적 사고(思考)를 운운하며, 신학의 멋을 말했지만 나한테는 귀신이 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했다.나는 신학에 대해 거의,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내 담임 교수가 나한테 진로상담이나 편입제도에 대해서만 잘 알려주었어도 그토록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 메타인지가 낮은 나는 눈치가 둔하여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오늘날까지도 이 모양 이 꼴로 산다.

 

그런데 그토록 절망스런 신학교였지만 한 줄기의 작은 빛이 조금씩 내게로 스며들었다. 이는 다름 아닌, 성서비평학, 즉 성서신학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성서비평학을 들으면 소화도 안 되고, 신학교 생활이 괴롭고, 그랬다고 하던데, 유독 나한테는 바로 그 성서비평학이 서광으로 다가왔다.

 

그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잘 생각해 보자, 성서비평학을 하려면,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걸로 내가 서양 사람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면 더 곤란하지 않은가? 그렇다! 그런데 무슨 빛을 보았다는 말인가?

 

잘 생각해보라! 성서비평학의 중요한, 한 동기는 역사학에 있다. 그렇다면 저토록 예리한 성서비평학적 통찰로 한국사나 동양사를 연구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다시 말해 성서비평학에 눈을 뜨는 게 아니라 한국사 연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어차피 키 작고, 못생겼으며, 열등인종일 뿐인 내가 서양의 성서신학을 알 게 뭔가? 그런 건 집어치우고, 한국학으로 하자!그래서 실지로 그런 연구에 몰입했다.

 

뒤늦게 고백하는 바이지만 나는 신학서적을 거의 읽지 않았다. 레포트 때문에 할 수 없이 건성건성으로 읽고 대충 제출한 것 말고는 별 게 없었다. 성서신학 레포트도 다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신학논문은 내게 중요하지도 않았고, 학점에는 더 관심 없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사회적 인지도에서 바닥이기 때문에 다녀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거였다. 나는 그 학교를 중퇴하고 싶었다. 내 생각에는 좋은 학교가 좋은 학생을 만드는 것 같았다. 그 학교가 싫으면 그 학교의 공부도 싫은 법 아니겠는가?

 

신학서적은 읽지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50독 정도 했다.별로 정보를 주지도 않는 그 생뚱맞은 책을 50독씩이나 하다니! 이런 미친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뭘 알아야 말이지!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집에 있던 역사 교과서나 죽으라고 읽은 다음 하루에 3시간에서 6시간 정도의 산책을 했다. 이게 나의 20대였다.

 

내가 신대원(M. Div.)을 전라도로 간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나는 부인도 전라도 사람으로 했으며, 결혼 주례도 전라도에서 목양 하신 분에게 부탁했다. 설마 내가 목사 고시 자격증 얻으러 거기를 갔겠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내 관심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경상도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곳 도서관에서 윤내현의 책을 만났다.신학교에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나 50독씩 하던 내가 윤내현을 만난 것은 마치 요시야가 잃었던 율법책을 찾은 것과 비슷한 감동이고, 에즈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고전(율법책)을 다시 읽은 것과 비슷한 감동이라고나 할까?

 

나는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를 읽으며 성령체험했다. 비로소 구약의 그 루아흐 식 체험이 무엇인지를 나는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를 읽으면서 하는 것 같았다. 그 당시의 나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몰랐다. 신학교나 다닌 내가 무얼 알겠는가?

 

만일 그 당시에 내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만났더라도 나는 아마도 성령체험을 했을 것이다. 그 거룩한 현존 앞에 갖게 될 만한 두려움을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배웠겠지만 나는 우리의 고전 앞에 꼬꾸라졌다. 만일 루아흐께서 나를 인도하셨다면 그 거룩한 에피파니는 윤내현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성서신학의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성서신학은 나를 한국학으로 공부하도록 안내해 준 중요한 길잡이였다.

 

나는 분명히 20대 때에 담임교수를 찾았었다. 내 기억으로는 편지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담임교수의 답은 ‘(당신의) 아버지와 상의하라!’이게 다였다. 그리고 이보다 더 악질(?)적인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나의 대학원 석사과정의 선생님이셨다. 그 분은 내가 무엇에 관심 있는지 너무 잘 알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나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다시 신학교 시절의 회상으로 돌아간다:

 

1995년인지 1996년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한복(韓服)입은 한 분의 강연자가 지방의 이름 없는 신학교에 강사로 오셨다. 보통 종교개혁주간 하면, 교회사나 조직신학 한 분들이 강사로 자주 오시는 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학교에서 개최한 종교개혁주간 행사에 구약학자가 오셨다. 강연의 성경본문은 열왕기하 228절이고, 제목은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였노라!”였다(그 강연문을 오래 전에 다운받았지만 지금은 분실 상태다).

 

이 강연과 유사한 설교가 000, <00교회 이야기>, 2. (서울: 00출판사, 1993), 149-158에 있다. 물론 이 설교문은 그 때의 그 강연문보다는 덜 구체적이다. 아무래도 신학교에서의 강연이 더 구체적이었던 것 같다.

 

이 설교와 강연은 나에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는 신학교에서 수많은 석학들의 강연들을 들었지만 이 강연만큼 나에게 인상적으로 박힌 강연은 없었다., 주제는 단순했다: 요시야의 명령으로 성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책을 왕 앞에서 읽었는데, 왕은 너무 놀라, 그 옷을 찢었다. 물론 율법책을 발견하였다고 해서, 그게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책을 해설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 해설사는 여자였다. 이게 참 특이했다.

 

그래서 그 율법책을 읽고 개혁이 실행됐는데, 그 개혁의 기준이 율법책이었다. 이 본문으로 그 강연자는 우리의 성전에서 우리의 율법책을 찾자!”라며, 아주 강하게 주장하신 듯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이 강연이 인생의 크나 큰 화두였다.

 

율법 책? 무슨 율법 책? 어디서 찾지?

 

그 때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율법책이란, 그들의 고전(古典)들이다! 율법 책 = 고전(古典)!그럼 우리의 고전들을 찾으면 된다. 그런데 성전에서 찾자구? 성전이 어디에 있는 데?

 

우리의 성전에서 우리의 율법책을 찾으려면 우리의 성전으로 가야 한다. 거기가 어딘 데?

 

그 한복 입은 미남(美男)의 강사는 그냥 툭 던지고는 훌쩍 떠났다. 해마다 해대던 그 많은 종교개혁 기념행사들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그 날 나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 율법책을 찾자! 신대원 입학은 포기하자! 그게 뭐 중요한가? 율법책을 찾아야지!

 

지방학교의 촌놈 주제에 꽤나 야무진 꿈을 가졌었다. 우리의 성전에서 우리의 율법책을 찾자!

 

이걸 어디에 가서 찾지? 이상하게도 나의 행보는 전라도였다!그곳에 가면 뭔가 있는 줄 생각했다. ‘있기는 뭐가 있어? 그냥 장신대 신대원 못가니까 갔겠지?’ 그래 옳다! 난 장신대 신대원에는 관심 없었다. 당연히 그 학자(강연자)가 근무했던 곳을 가려면 장신대로 가야 했겠지만 내 관심은 딴 곳에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장신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물론 형식 상 입시는 치렀지만 면피용이고, 그런 경쟁은 관심 밖이었다). 그보다는 전라도로 갔다.

 

과연 나는 율법책을 찾았을까? Yes! 잘 봐주어도 대략 30%정도의 성공률로 쓸 만한 기적이었다.

 

그런데 골 때리는 일이 생겼다. 그 시절 나는 열 살 어린 사람이랑 연애를 했다. 미친 놈! 원조교제하나? 글쎄! 인생이 참 우여곡절이다.

 

그런데 더 골 때리는 일이 생겼다.

 

그 때의 그 강연자를 만날 희한한 우연이 발생했다. 나와 연애했던 그 여학생의 모 교회가 00교회다. 바로 그 강연자가 독일유학 마치고, 시무했던 곳이다. 그분말로는 장신대 교수를 거절하고 간 곳이 00교회라나 뭐라나?

 

혼인주례는 처가에게 부탁하기로 했는 데, 주례는 그 곳에서 목회하시다가 서울로 떠났던 그 목사님에게 맡겼다. 골 때리게도 그 목사는 그 날 혼인주례 하는 날에도 어김없이 한복(韓服)차림을 하고 오셨다.

 

그 강사를 혼인 때문에 만났다. ∼∼∼

 

인연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신학교 때 그 한 강연이 인상 깊게 박혔고, 그래서 우리의 성전이 어디 있는지 몰라, 막연하나마 전라도로 갔으며, 특이하게도 거기서 10살 연하의 여학생이랑 연애 했는데, 하필 그 강연자가 거쳐 갔던 교회의 교인이었으며, 혼인주례도 그 강연자에게 받았다.

 

당연히 나는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먼저 E 메일로 질문했는데, 그분은 너무 바빠, 자세하게 답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질문의 요지는: 요시야가 발견한 율법 책은 이스라엘의 고전(古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성전에서 우리의 율법책을 찾자는 말씀은 우리의 고전들을 찾자는 말씀입니까?

 

그 때 그 교수님은 난감했는지 바빴는지 대답이 시원찮았다. 바쁘니까 만나서 얘기하자는 거였다.

 

그래서 겨울방학 때 기대에 부풀어 드디어 그 한복 입은 신학자를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기대는 영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율법이나 성전에 대한 답은 없었고, 진로문제의 주제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2년 쯤 전임목회를 해보고, 그 후에 다시 대화하자고 했다.

 

최악의 상담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그 지긋지긋한 2년을 견뎌보기로 했다.

 

교회가 나쁜 곳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최악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인생의 전()실존과 꿈들이 그 한복 입은 강사 때문에 망가지는 듯 했으며, 나는 마치 지옥에 발을 담그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교회로 갔다.

 

몸은 교회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부교역자로서 바쁜 것이 싫었고, 어느 장로님의 잔소리들이 나에게는 관심없었다(쓸모없는 소리들).

 

그 교회생활 가운데서도 나는 기회를 엿보았다. 그 당시 나는 신학석사 학위를 갖고 있었지만 다시 석사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듣기로 단국대학교가 역사를 잘 가르친다고 하더라. 그리고 단국대학교에 가면 윤내현 교수님이 계시는 듯 하여, 다시 부푼 꿈을 갖고 드디어 단국대 대학원 석사과정 사학과에 지원했다.

 

5명 모집에 5명 지원, 별 일 없으면 합격이다. 더군다나 석사라 그다지 치열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의외의 결과였다. 불합격!소름 끼칠 일이었다. 면접 때 그 학교의 교수님이 몇 번이나 나에게 묻더라: 신학한 사람이 뭐 하러 여기 왔소?

 

그걸 그 짧은 시간에 어찌 설명할 수 있으리오! 더군다나 나는 사학과에서 무얼 요구하는 지 전혀 몰랐다. 그 날은 참 재수도 없었다. 불합격 소식을 듣던 날 아내는 미술실에서 작업하다, 용접봉의 불꽃이 눈에 튀어들어 하마터면 다칠 뻔 했다.

 

경험부족에 형편없던 학벌스펙, 그들에게는 내가 밥이었다.

 

그러나 역지사지 해 보니, 일견 이해 될 법도 했다. 내가 그 학교의 교수라도 떨어뜨렸을 가능성이 있다.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결국 대안이 없어, 그 한국사를 배우지 못한 채 또 다시 역사공부를 독학하기로 했다. 몸은 교회에 있었지만 나의 머리 속에는 늘 내 연구영역들이 맴돌았었다.

 

그리고 그 한복 입은 강사와의 약속대로 2년 후, 드디어 그 교수를 찾았다. 그러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그분 왈: 나 때문에 교회로 갈 필요는 없어요!”

 

둔기로 머리를 맞았다고 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형언하기 힘든 충격과 배신감이었다!

 

물론 법률적으로는 귀책사유가 그에게는 없을 듯하다.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오, 구체적 약속을 하거나 변호사의 공증을 받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점장이를 만나, 점을 쳤는데, 그만 그 일이 실패했다고 쳐 보자, 이런 일로 법정에 고소할 수 있을까? 없지 싶다.

 

당연히 법률적 책임을 그 교수에게 물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그 분노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견뎠다. ? 내가 약자이니까!

 

그리고 설령 따져본 들 법률적 귀책사유가 없을 텐데, 무슨 수로 항의 하겠는가?

 

물론 그분에게는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서울대 법대 출신에 독일박사!

 

그 시절에는 이 스펙 한방이면 끝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학자로 기억하겠지만 나는 그분을 문헌학자로 평가한다: 히브리 문헌학자!

 

왜 시골교회에서 목양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다양한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그분이 일반인들에게 잘 공개하지 않은 듯한 이유 한 가지를 내게 알려주셨다: 보통 기득권은 글로써 지배하고, 글 문학이나 글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려왔다. 그러나 글들이 밝혀주지 못하는 말 전승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한 말 전승들 중, 시골을 가면 혹시라도 우리가 잘 몰랐던 특성이 있을지 몰라, 시골로 갔고, 본인의 신분이 목사이다 보니, 시골교회의 목사로 간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연구방법은 민속학자나 국어학자나 국문학자들이 쓴다.

 

과연 히브리 문헌학자 다운 발상이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의 그 사람은 무책임하고 몹시 기분 나쁜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그 유명한 신학자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다. 나는 지금도 그분을 좋아하지 않으며, 실망감이 적지 않다.

 

오늘날 신학교에서의 교수 영역들이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점수놀이(학점매기기) 식 사무관이다. 사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다. 이것 말고 뭐 그리 특별한 판정의 영역들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 사무관들로부터 학점들을 받아, 졸업했다고 치자. 그 다음은 뭔 데?

 

목사고시?미안하지만 오늘날에는 목사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갈 곳들이 심히 부족하다.

 

그런데 왜 신학생들은 그 점수매기기 식 사무관들(신학교수들)에게 뭐라도 기대하는 걸까?

 

과연 그분들이 인생의 조력자들로서 적합하다고 여기는가?

나의 경험으로는 상당한 실망감들을 느꼈다.

 

신학생들이여, 교수들을 우상화 하지 마시라!어지간한 신학교수들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더 의지하시길 바란다.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하면서 이 글을 맺겠다:

 

2018년도에 신학교수들에게 영향 받은 신학생들이 동맹휴업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 신학교수들이 뭐라고 그런 일을 두고 학생들이 동맹휴업씩이나 한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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