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W.C.C. 문서에서의 요한계시록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2/06 [14:04]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W.C.C. 문서에서의 요한계시록

공헌배 | 입력 : 2019/02/06 [14:04]

 

데이비드 J. 보쉬가 쓴 책 중에 아래와 같은 명저가 있다:

 

Bosch, D. J. Transforming Mission. New York: Orbis Books, 1998.

 

이 책에서 인상적으로 볼 부분 중 하나는 종말론과 선교와의 연관성인데, 특별히 천년왕국설이다. 즉 전()천년주의냐 후()천년주의냐의 문제와 선교와의 연관성이다. 이에 따라 초기한국개신교에서도 천년왕국론이 선교의 주요 모토였다는 것이고, 이게 실은 신학계에서도 더러 주장되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초기한국의 개신교회는 요한계시록 형 교회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 흐름에는 적지 않은 변화들이 나타난 듯하다.

 

사실 보쉬는 전천년주의던 후천년주의던 모두 계몽주의 패러다임의 선교 행태로 여긴다. 그리고는 보쉬가 현대의 에큐메니컬 패러다임의 선교를 소개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해 볼 수 있다. 한국개신교회에서는 계몽주의 패러다임을 통과하여 에큐메니컬 패러다임 안에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계몽주의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그 중간지대에서 머뭇머뭇하는가?라는 등의 질문들이 있어야 한다.

 

일단 W.C.C. 문서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여기는지 살펴보자:

 

마지막 환상 86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통해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새 하늘과 새 땅, 즉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화해의 결과인 새로운 창조세계에 관해 기록하였다(참고 계 21:1, 5, 고후 5:17-18).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사는 화해된 도시이다. 정의가 세워진 이 도시에서는 더 이상 애통과 통곡과 고통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안에 있기에 더 이상 어둠도 없다. 도시 중앙으로는 열방을 치유하는 생명의 강이 흐른다(21:1-22:5). 세계선교의 현장에서 우리는 다가올 세계(오이쿠메네)” (참고 히 2:5, 13:14 이하)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오이쿠메네는 기존의 생명을 가진 문화 사이에 정직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개방 된 사회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마치 궁극적 타자인 하나님께 자신을 개방하듯이 다른 사람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오이코스)이 되어야 한다. 이 집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정체성의 다원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으로서의 화해는 오이쿠메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이로부터 유래된 에큐메니즘 등의 파생어를 낳는다. 이러한 용어는 모든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 전체 인류, 연합된 보편적 교회 등과 같이 더 이상 관념적 보편성을 배타적으로 언급하는 용어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용어는 더 이상 주어진 상황을 묘사하지 않고, 대신에 여러 교회 사이, 여러 문화 사이, 인간과 사회 사이, 인간과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하나님의 창조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실질적 관계를 묘사한다(WCC Publications,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Geneva: World Council of Churches, 2005)/ 김동선 옮김,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192-193).

우선 이와 같은 내용들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말할 때의 체험과 의도는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중략) 그것이 실제로 저 사람에 대한 사고의 표현이려면 그것은 좌우간 어떤 하나의 언어와 어떤 하나의 맥락에 속해야 한다(Ludwig Wittgenstein/ 이영철 옮김, <철학적 탐구> (서울: 서광사, 2002), 2323 ).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할지 난감하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주의를 기울려야 할 것은 그것이 상징어인지, 지시어인지의 분석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들의 기재로 약간의 분석을 해 볼 때, W.C.C. 문서에서의 주요 주장은 화해보편인 듯하다. 즉 인간, 세계, 종교 등의 차별들을 구획하기보다는 화해시키려는 듯 여겨진다.

 

이와 같은 W.C.C.의 문서는 성경의 문자적 적용을 회피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이유는 첫째, 요한계시록은 화해의 책이 아니라 신원의 책인 듯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맺힌 성도들의 기도들이 하늘에 올라갔고, 이에 하늘로부터 진노의 대접들이 쏟아져 성도들의 원수들을 잔인하게 짓밟아주시며, 확실하게 복수해 달라는 신원의 책으로서 잔인한 책이기 때문이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보편구원론을 주장한 듯 하지 않다. 특별히 생명록에 그 이름들이 있는가 없는가 또는 짐승의 표를 받았는가 아닌가라는 구획적 구별이 강조된 책으로서, 화해보다는 신원과 복수의 책으로서 다소 유대교적이거나 구약적 맥락과도 연관 된 듯하다(이사야 61:2와 비교.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은혜의 해로 고쳐놓았음).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크게 두 가지의 방법이 적용되어 왔다. 첫째는 상징적 적용이고, 둘째는 문자적 적용이다. 상징적 해석이란 그 요한 계시록의 기록들이 현()사태를 반영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 계시록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 사태나 현상학적 적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문자적 해석이란 일종의 역사적용적 해석인데, 실지로 그 계시록의 기록은 현()사태로서 존재하며, 미래에 일어날 일일 뿐만 아니라 현상적으로도 일어나야 할 사태다.

 

어느 해석이 더 옳을까? 이 두 개의 해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검증 식이 필요한데, 나는 이에 대해 논리로 적용해 보려 한다. 내가 이 방식을 택한 이유는 언어철학을 조금 공부해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어느 신학자가 밝힌 대로 하면,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대로 할 때, ‘윤리나 종교의 주장들은 헛된 말들이다하지만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방식의 엄격한 언어철학을 적용하지 않겠다. 그 정도로 엄격하게 적용해버리면, 우리 인류가 살아왔던 많은 현상들 또는 현 사태들이 검증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 식의 적용을 보류한다.

 

대신 인간사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던 계약적 논리로 해석한다. 여기서 주장한 계약적 논리란, 한 마디로 사회계약이나 관습에서 인류가 보편적으로 동의할만한 논리다. 이를테면 법률이나 도덕은 논리가 아니라 사회계약이지, 옳고 그름의 의견으로 파악될 만한 명제는 아니다. 도덕이나 법률은 사회적 관습이요, 사회적 계약이다.

 

그 사회적 관습에서 받아들일 만한 논리를 필자는 편의 상 계약적 논리로 명명한다. 그런데 이 논리에서도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야 한다. 통일성과 일관성이다. 논리는 무엇보다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옳든 틀리든 간에 논리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요한 계시록의 해석 방법을 살펴보자, 요한 계시록을 상징적 해석으로 하든 문자적 해석으로 하든 간에 한 가지 만큼은 뚜렷해야 한다. 일관성이다. 즉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야 한다. 반대로 상징적으로 해석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상징적으로만 해석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논리이다. 다시 말하건대, 일관성이 없으면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헛소리(nonsense)이다. 그래서 일관성 있게 해석해 보자,

 

요한 계시록에는 짐승(beast)이 나온다. 그 짐승은 둘이다. 다시 말해 짐승이다. 사람이 아니다. 계시록 13장에서 발행하는 짐승표는 짐승이 발행하는 표이어야 하지, 사람이 발행하는 표가 되면 안 된다. 말 그대로 짐승이 인간들에게 존경 받으며, 그 짐승이 표를 발행하여 인간들을 통제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로마 가톨릭의 교황을 거론했는데, 이는 모순이다. 내가 보니 교황은 사람들이었지, 동물(beast)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승을 황제 네로교황에게 적용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황제 네로나 교황들은 사람들로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계시록 13장에는 짐승의 수가 나온다. 심지어 세어보라고 했다. 그러면 세어볼 수 있다. 동물들 중, 그 학명이 666으로 나오는 종()을 찾으면 된다.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동물들의 학명이나 동물들의 이름으로 게마트리아 해야 한다.

 

반대로 상징적으로 해석해 보자, 만일 상징적 해석을 적용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상징적으로 해야 한다. 이를테면 천국도 상징이고, 불못도 상징이며, 짐승도 상징이고, 여자도 상징이며, 나팔도 상징일 뿐만 아니라 천사도 상징이며 어린 양도 상징이다. 그 모두를 상징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사태로서의 적합성이 없다.

 

계시록을 따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불못에 던진다고 했다. 그런데 불못도 상징이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던져지는 게 아니라 그 던진다는 의미의 상징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상징은 지시어로써는 적합하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인류사회는 도덕이나 법률의 언어들 혹은 금기(터부)의 언어들을 써 왔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상징어가 아니다. 이를테면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녹색신호등에서는 출발하고, 적색신호등에서는 멈추어라라는 등의 언어들은 지시어인데, 법률상의 언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다. 알아듣는 이유는 물리적 연관이나 논리적 적합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계약에 의해서다.

 

즉 사회적 관습으로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고, 학습도 가능하다. 그러나 상징어는 알아듣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상징어는 두 가지 이상의 뜻을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상징어는 논리가 될 수 없다.

 

가령, 계시록처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심판을 받는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려면 그 짐승의 표는 인간이 발행한 표가 아니라 짐승이 발행한 표 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 누가 보아도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가 모여도 바로 저게 짐승표이다라고 할 만큼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상징어는 그렇게 의견이 모아지지 않는다. 계시록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불못에 던진다고 했는데, 그 사유가 옳지 않음을 반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상징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왜 너는 짐승표를 받았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게 짐승표인지 몰랐습니다라고 하면 된다.

 

사회적 계약이나 관습을 따라 인지하는 인간들에게는 상징어로 형벌하면 안 된다. 인지 가능한 격률로써 심판해야 한다. 이를테면 도로교통법이나 형사소송법과 같이 명확한 사유가 입증될 만한 사태들로서 심판해야 한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타난 주장들이 현()사태로서의 정합성을 가지려면 문자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즉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출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짐승이 사람들로부터 숭배 받아야 한다. 당연히 이는 상징이 아니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판별해도 짐승(동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짐승이 인간들에게 지시하고, 인간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짐승의 주관으로 표를 발행해야 한다. 바로 그 표가 짐승표이어야 하는데, 인간들은 누가 보아도 그게 짐승표인지를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심판이 적합하다.

 

그 수는 짐승의 수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들 중, 그 학명을 게마트리아 했을 때, 666에 해당하는 종()에 주목해야 한다. 언젠가 인간들이 동물한테 지배받는 날이 이르면 그 때는 요한 계시록이 성취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뒤에 단서가 하나 더 붙어 있다. 짐승의 수라고 하더니, 한 사람의 수(a human number)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교황권()을 짐승에 견주어 666이라고 했는데, 교황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었다. 그래서 교황권() 자체를 짐승의 수에 견주는 것은 무리다. 인간의 수라고 할 때의 그 인간은 한 사람 또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사람의 수이면 사람의 수이고, 짐승의 수이면 짐승의 수()인 게지, 짐승의 수()인데, 사람의 수라는 뜻은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어떤 이들은 요한 계시록을 해석할 때 어떤 부분은 상징으로 적용하고, 어떤 부분은 문자로 적용한다. 바로 이런 걸 일컬어 헛소리(nonsense)라고 한다. 다시 말해 비()논리이다. 논리는 일관성이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다. 아주 쉽게 설명 하겠다: ‘저 색은 파란 색이지, 빨간 색이 아니다라는 것은 타당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 색은 빨간 색도 되고, 파란 색도 된다라고 하면 비논리이다. ‘저 새는 까마귀이지, 백조가 아니다라고 하면 논리이다. 그러나 저 새는 까마귀도 되고, 백조도 된다라고 하면 비논리이다.

 

요한 계시록이 타당하려면 그 해석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징으로 해석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상징이어야 한다. 반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문자로 해석해야 한다.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해석은 그 자체로 오류(誤謬)이다.

그렇다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헌법>21세기 신앙고백서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룩될 것을 믿는다(21:1-6). 그 세계는 부활한 하나님의 백성과 새롭게 창조된 만물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원한 교제를 이루는 영생의 나라가 될 것이다(7:15-17, 22:3-5).

 

뭔가를 믿기는 믿는 듯 한데, 너무 밋밋하다. 이 고백은 W.C.C. 문서에 견줄 때에도 여전히 밋밋하다. 차라리 W.C.C.의 문서가 좀 더 구체적이다. 소위 W.C.C. 가입 교단이라면서 왜 이 부분은 이리도 밋밋한가?

 

앗싸라 하게 W.C.C.의 문서를 그대로 옮기면 안 되는가?

 

? 또 합동 측의 눈치를 보는가? 무엇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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