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대의 '경건과 학문', '학문과 경건'으로

경건보다 학문이 앞서, 죽은 신학의 사회

황규학 | 기사입력 2019/01/23 [14:19]

장신대의 '경건과 학문', '학문과 경건'으로

경건보다 학문이 앞서, 죽은 신학의 사회

황규학 | 입력 : 2019/01/23 [14:19]

장신대의 모토는 경건과 학문이다. 그러나 최근 학문과 경건으로 바뀌고 있다. 학문이 경건을 앞서고 있다. 실천신학조차도 사변화로 흐르고 있다. 특히 성서학이나 실천신학은 학생들이 졸업 후 바로 실천 목회로 연결이 되는데 점점 사변화, 학문화로 가는 것은 경건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성서학은 성서의 내용보다 저자나 연대기, 편집, 문서비평이 더 큰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성서학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학문으로 전락하여 역동성을 상실하고 있다. 영감의 저서가 아니라 하나의 연구대상으로서의 책이 되어 버렸다. 마태복음의 내용보다 마태복음의 형식, 문서설, 비평설, 저자의 의도가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Q문서설까지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실천신학까지 사변화로 흐르고 있다. 실천신학 중에서도 설교학은 청중들에게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성경의 통찰력, 심령의 감화, 영적인 각성, 치유, 교훈 등이 상당히 중요한데 최근 장신대 교수들의 연구논문을 보면 상당히 사변화로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의 해석학이란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변화 되어서는 안되고 좌우에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고 날카로우며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해야 한다.

 

그러나 장신대 설교학 교수의 논문을 보면 지나칠정도로 사변화 되어 있어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설교라는 것은 기교도 테크닉도 아니며 해석학도 아니고, 성경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면서 자신이 영적 감화받은 내용을 현실의 상황에 빗대어 전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다. 설교 역시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회개시키는 능력, 병을 고치는 능력, 절망에서 소망을 갖게 하는 능력,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설교의 사변화

 

그러나 설교학의 내용이 지나칠 정도로 학문화 사변화 되어 있어서 설교가들에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고사하고 영적인 감화감동으로도 설교하기도 어렵다. 설교할 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설교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경험과 삶의 체험으로 이루어 질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만난 설교가들은 주보 광고를 해도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설교는 1시간 설교를 해도 졸립기만 하다. 연설처럼 들리는 것이다. 영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장신대 설교학은 영적으로 감화감동하는 설교보다는 설교자체를 무미 건조하게 만든다. 이는 설교의 방법론과 학문화에 촛점을 둔 나머지 설교의 기본인 영적인 능력을 재현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는 학문이 아니고 학문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영성과 무릎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방법론으로 되거나 테크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성령의 능력이 있을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손양원목사는 설교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서기도 하였다.

 

하늘의 설교학

 

설교의 기본은 하나님의 체험이다.  바울, 베드로, 어거스틴, 빌리 그라함, 한경직, 박조준, 조용기, 이동원, 곽선희, 김삼환, 이성헌, 이상근, 지용수, 이천석, 윤석전, 오관석 등은 모두 체험의 사람들이었다. 임은빈, 정도출, 민경설목사도 체험의 사람들이었다. 조병호 목사 역시 흑숟가락을 물고 태어났다. 

 

이들에게는 설교학이나 신학이 필요 없었다. 하늘의 감동이 그들의 설교학이었다.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말씀(예수)이 임해야 한다.

 

능력의 설교를 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신학과 설교학은 그들에게 거추장물이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장신대에서 설교학을 정식대로 배운 사람들치고 위대한 설교가가 없다. 장신대의 설교학이 이미 사변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신대에서 정상적인 설교학 박사로부터 설교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목회에 성공한 것이다.

 

김삼환, 지용수, 김창인, 나겸일 목사

 

김삼환, 지용수, 김창인, 나겸일 목사 등은 서구의 설교학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교단에서 개척을 한  이들은 신학이나 설교학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대중들에게 감화감동을 끼쳤던 설교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통합교단의 주류를 이어 왔고 공통적으로 모두 총회장을 지냈다. 통합교단은 흙숫가락을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금숫가락을 물게 되었다.  한 때 김창인 목사의 3대지 설교는 교단목사들이 대부분 선호한 설교스타일이었다. 김창인목사의 영향을 받은 임은빈 목사 역시 학문의 백그라운드가 없어도 대형교회를 이루기도 했다. 임은빈목사는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현재는 부총회장에 출마한 상태이다.

  

김창인, 김삼환, 나겸일 목사의 공통점은 모두 폐병에 걸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부활한 사람들로서 결국 하나님의 금숫가락을 문 사람들이다. 정도출, 민경설 목사 역시 마찬가지 이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기사회생한 사람들이 대체로 설교에 힘이 있고 영적 감화가 있고, 능력이 있고, 목회에 성공했다. 민경설목사는 약 5,000 여명의 성도가 되었고 정도출목사는 약 3,000여개 교회 부흥회를 다닌 사람이다.

 

땅의 설교학

 

장신대  C 교수의 논문을 보자. 설교가 사변화 되었다는 느 낌을 받는다. 이는 단지 C 교수만의 문제는 아니다. 직영신학대학원 대부분의 설교학 교수들의 연구스타일이 유사하다. 사변의 설교학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면 이는 땅의 설교학 이다. 이것이 설교학자의 논문이라면 이러한 것으로 얼마나 영적 감화감동을 주어 설교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가?

 

이러한 글을 읽거나 가르침으로 빌리 그라함이나 스펄젼, 조용기, 한경직, 김삼환, 지용수 목사 같은 하늘의 설교가가 될 수 있는가? 장신대의 설교학은 땅의 설교인 사변에서 벗어나야 한다. 죽은 설교학의 사회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C교수의 논문을 보면 하늘의 설교학이라기 보다는 땅의 설교학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므로 그의 논문을 보면 설교를 사변화, 형식화, 철학화, 신학화, 형이상학화 시키고 있다. 설교의 문제를 성서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없어서 라고 주장한다. 설교의 문제는 성서텍스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영감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C교수의 결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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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신앙의 산물

 

이러한 결론은 C교수가 잘못 판단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성서 텍스트를 상실한 데 있지 않고 설교학 교수들이 설교를 지나칠정도로 사변화, 철학화, 신학화 시키는데 있다. 설교는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신앙과 영감의 산물이다.

 

영락, 소망, 주안 장로교회, 죽은 설교의 사회

 

실제로 장신대 설교학교수 출신인 주승종 교수가 목회하는 주안장로교회는 설교학을 정상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나겸일목사 시대보다 설교의 영적 감화력이 약해지자 많은 신도들이 교회를 떠나갔고 교회가 영적인 시험에 들어 바람 잘 날이 없는 실정이다. 

 

아무리 당회장실에 주기철목사의 사진을 붙여놓고 설교시 주기철목사의 후손이라고 외쳐대도 교회가 점점 약화되고 신도들이 하나둘 씩 떠나는 것이다. 죽은 설교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과 형식, 논리와 이성의 설교는 가방끈이 짧지만 영감의 설교를 한 D.L무디, 이천석, 김익두, 조용기 목사에게서 배워야 한다.        

 

소망교회나 영락교회도 마찬가지 이다. 아무리 전임자를 흉내내고, 이북출신이고, 학위를 갖고, 지역상 강남이나 서울 한복판에 있어도 교회가 전임자처럼 부흥되지 않고 교회가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은 죽은 설교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가방끈이 긴 설교학자가 설교학을 정상적으로 배우지도 않은 가방끈이 짧은 목사보다 설교를 못하는 것이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목연출신자들보다 설교를 못하는 것이다. 박사학위가 천주교신학, 통일교홍보신학, 비영성을 커버하고 있다. 박사학위는 특정 주제에 대해 자기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쓴 것에 불과하다. 박사학위는 오히려 영적인 부분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적 가르침이나 율법을 초등학문으로 여겼던 것이다.    

 

교인들이 교회를 점점 떠나가는 것은 영적 감화설교가 없기 때문이다. 내용과 목소리는 좋은데 영성이 없다보니 드라이 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설교학 교수의 약점이다. 이는 설교를 지나치게 학문화,사변화, 이성화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연설이다. 배운 사람들은 연설을 설교처럼 착각하고 있다.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재현되지 않고 영적 감화감동이 없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설교는 죽은 설교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적인 설교나 능력이 없는 설교는 도구에 불과하다. 설교는 방법론이나 해석학, 논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영감과 능력의 문제이다. 영감이 없는 설교는 죽은 설교이다. 아무리 논리가 뛰어나고 미사려구를 말해도 사변화하거나 능력이 없는 설교는 죽은 설교이다.    

 

장신대 출신이라면 성서의 텍스트 정도는 기본이다. 그러나 장신대 80기 이후에 설교학이나 신학을 정식적으로 배운 사람들로서 자신이 개척하여 설교나 목회에 성공한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 이다. 물론 현실적인 목회의 성공도 성공이지만 예언자적인 설교의 외침도 없었던 것이다. 

 

목회 성공한 사람, 대부분 70년대 학번

 

목회에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인 70년대 학번이나 목연출신, 비학력자 출신 등이다. 즉 목회는 설교학 박사학위를 받은 설교학교수로부터 정식대로 배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학력이 없어도 하늘의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설교였던 것이다. 현재 장신대 설교학의 문제는 설교의 방법론, 설교의 해석학, 설교의 학문화에 촛점을 두는 것이다. 설교학 교수라면 학생들을 스펄전이나 무디, 빌리 그라함, 찰스피니, 조나단 에드워드, 조용기, 한경직, 박조준, 곽선희, 이동원, 옥한음, 이성헌, 이상근 처럼 위대한 설교가로 만들 책임감이 있다.  설교학을 장신대에서 배운 사람들이 10년 목회해도 교인 10-20 여명 선에 머문다면 이는 영감의 설교가 아니라 학문의 사변적인 설교학을 배운 것에 불과하다. 설교가의 정신과 영성, 역동성이 죽어버린 것이다. 관행과 관습, 모방, 형식만 남은 것이다.     

 

조용기, 김삼환, 지용수, 김창인, 한경직 목사는 불트만, 몰트만, 케제만, 폴 리꿰르를 몰라도 목회에 성공했다. 그들은 설교의 사변화를 배운적이 없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얻은 영적 감화와 체험을 갖고 몸과 삶으로서 설교했기 때문에 위대한 설교가가 될 수 있었다. 설교학을 정식대로 배우지 않더라도 설교에 성공한 것이다.  말씀(설교)은 말씀이신 예수로 부터 감동이 와서 말씀(성경)을 전할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지, 설교의 방법론, 설교의 해석학을 잘 안다고 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교단헌법은 설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1-2-5. 설교는 말씀 선포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훈련받은 종을 통하여 오늘의 회중들에게 바르게 선포되고 정확하게 해석되고 효율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배 가운데서 선포되어진 이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은 하나님과 늘 새로운 만남을 가져와야 하며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되는 확신과 구원의 은총을 계속 받아야 한다.  
  
2-1-2-7. 예배 중의 설교는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한 시간 내에 설교하되 설교자의 지식과 경험과 예화로 일관되지 않고 하나님과 그 말씀이 주종이 되어 회중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단헌법(예배의식)은 사변화된 설교와 지식화된 설교를 통해서는 하나님과 새로운 만남을 갖게 하기 어렵다고 규정하고있다.   

 

죽은 설교학의 사회

 

C교수는 결론에서 리꾀르의 믿음의 해석학이 한국교회의 말씀 사역에 한국교회의 전망을 제시해준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과연 리꾀르의 믿음의 해석학대로 설교한다고 해서 제2의 박조준, 이동원, 하용조, 옥한음, 이성헌, 이상근, 김삼환, 김창인, 지용수, 곽선희 목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현재 장신대 설교학 교수가 설교에 실패하여 교회가 점점 어려움에 빠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성과 논리가 만연한 서구의 설교학만 갖고서 영적인 감동이 없는 설교는 실패한다라는 명백한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장신대의 설교학은 사변화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죽은 설교학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구의 학문에 막혀 한국인의 역동적인 영성이 실종하고 있다. 이단감별사들은 근본주의적 교리영성으로 전락했다.  어설픈 학문적 영성, 사변적 영성, 교리적 영성이 통합교단의 영성목회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C 교수의 글을 보자. 설교학을 지나칠정도로 사변화, 철학화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인간의 해석학으로 극복하고자 하고 있다. 장신대의 목적은 교단이 요구하는 좋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철학자나 신학자를 양성하는 기관이 아닌 것이다. 장신대는 경건이 없는 사변화 된 학문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죽은 신학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성과 능력없는 설교를 설교학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다음의 글을 보면 장신대의 설교학은 지나칠정도로 학문화, 사변화, 철학화 되어가고 있고, 많은 시간을 설교의 능력보다 설교의 해석학, 설교의 방법론, 설교의 전달력에 쏟고 있다. 도구로서의 설교에 중점하고 있다.

 

다메섹 vs. 가말리엘

 

불행하게도 서구의 설교학을 배운 사람들 중에 자생적인 한국의 영성체험을 근거로 한 설교가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오지 않은 것은 왜 일까? 설교는 가말리엘의 학문보다 다메섹의 영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신대의 설교학이 점점 사변화 되어가고 있는 것은 다메섹보다 가말리엘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과 학문에서 학문과 경건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설교는 통찰력이고, 능력이고, 영성이다.

 

장신대에서 천주교 영성과 사변화된 설교학, 드라이한 성서학을  배운 사람들 중에 과연 좋은 설교가가 나올 수 있을까?  점점 장신대 신학이 '경건과 학문'에서 '학문과 경건'으로 사변화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즉 다메섹에서 가말리엘로 변해가는 것이다. 설교학 A 학점을 받았는데 목회에 실패한 것이다. 

 

학문을 중시한 80년대와 90년대 사람들 중에 경건을 중시한 70년대 설교가들처럼 뛰어난 설교가가 있을까? 장신대에서 최근 걸출한 설교가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다메섹보다 가말리엘을 선택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꽃잎(경건)은 바람(학문)결에 떨어지는데 경건과 학문의 장신대 신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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