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에 관하여

아마추어처럼 하지 않길 바란다...

공헌배 | 기사입력 2020/12/12 [20:36]

근본주의에 관하여

아마추어처럼 하지 않길 바란다...

공헌배 | 입력 : 2020/12/12 [20:36]

 

2020년 한국조직신학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배타성에 대한 종교사회학적 비판” <진리와 폭력>, 15회 한국조직신학자 전국대회 자료집, (2020, 09): 195-207.

 

이 논문의 제목에서 드러난 것은 종교사회학적 비판이다. 그렇다면 이 논문이 어떤 종교사회학, , 어떤 사회과학의 이론에 천착했으며, 무엇을 렌즈로 하였는지를 조명해주어야 한다. 나는 이걸 충분히 알기 힘들었다.

 

다른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V. Turner/ 강대훈 옮김, <인간 사회와 상징 행위> (서울: 황소걸음, 2018), 29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커뮤니타스는 부족사회의 통과 의례, 천년왕국 운동, 수도원 생활, 반문화 운동, 그 외 수많은 비공식적 상황에서 발견된다.

 

 

, 사회과학의 이론으로 여러 의례 및 종파를 분석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다시 말해 근본주의라 하여 무조건 비판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 그 유형의 사태를 분석할 만한 사회과학의 렌즈가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2020년 한국조직신학회의 그 논문은 사회과학적 렌즈에 의한 분석보다는 이념적이며 비판 그 자체에 목적을 둔 듯한 인상이다.

 

또 다른 하나의 사례는 폴 틸릭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폴 틸릭은 기독교 근본주의를 신경증적 병증으로 여겼다.

 

물론 이와 같은 사례는 이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보여 준 강박 행동과 종교 행위라는 논문에 어느 정도 비교가 된다. , 폴 틸릭의 그 주장(신경증)은 이채롭지 않다.

 

또한 폴 틸릭은 그의 주저인 <조직신학>에서 정통주의를 비판했다. 그의 조직신학을 읽으면 그 흐름이나 그의 주장이나 그의 의도는 알 듯하다. 왜 그런지 틸릭의 주장에 심정적 공감은 된다.

 

그러나 내가 의심하는 것은 과연 폴 틸릭이 정통주의자 누구의 책을 읽었는지 신뢰하기 힘들었다. 과연 틸릭이 정통주의자들의 책들을 충실하게 연구했을까라는 약간의 의구심이 든다.

 

또한 제법 오래 전, 모 신학대의 전() 총장께서는 근본주의보수주의자들에게 얼어붙은 폭포수와 같다고 하셨는데 이 역시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정통주의의 시대에 종교전쟁을 했고, 정통주의의 시대에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건국한 놀라운 일들까지 실행됐는데, 그게 어떻게 얼어붙은 폭포수인가? 정통주의의 시대야말로 문화인류학의 이론을 빌리면, 뜨거운 유럽 사회 또는 역동적 시대, 열정적 시대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유럽의 정통주의자 누가 그토록 얼어붙었는가?

 

다른 하나의 이론은 조직신학적일 텐데, 근본주의를 다소 비()학술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이다.

 

이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조직신학에서 그렇게 할 수 있지, 문화인류학, , 사회인류학에서는 접근방식이 달라야 한다.

 

흔히 에큐메니컬 선교신학 하신 분들 보면; 뭔가 도식 화 된 듯한 인상이다. 이를테면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해 전()천년주의 근본주의자들, 반공주의에 영향을 미친 분들, 개인구원에 몰입하여 사회구원을 등한 시 한 분들,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사들, 기독교의 비()정치화에 앞장 선 분들 등의 수사들이 따라붙는 듯하다.

 

과연 이와 같은 이해들이 옳을까?

 

앞 뒤 맥락들 다 자르고, 시대상황이나 조선 말의 현실도 무시하고, 민중의 절박함 등을 모두 생략한 채 선교사들의 주장들을 명제형식처럼 듣는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인류학에서는 그렇게 접근하면 곤란하다.

 

위에서 인용 된 빅터 터너의 연구방법대로라면, 근본주의, 특히 한국에서의 소위 내한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해 흔히 조직신학이나 에큐메니컬 진영의 주장들처럼 그런 식으로 판정하면 비()학술적 주장처럼 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에 대해 사회과학적 렌즈나 인류학적 민족지처럼 조사 된 것이 아니라 관념적 또는 이념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근본주의 공동체 또는 수도원 운동 또는 원주민 공동체의 의례 행위 등에 대해 말 할 때에는 옳고 그름의 의견들처럼 주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에 상반하는 에큐메니컬 주의자들에 대해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 문화상대주의 이론대로 한다면, 근본주의는 비()학술, 에큐메니컬은 학술: 이런 식으로 구별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빅터 터너 식 사회인류학으로 한다면; 근본주의는 상당한 연구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특히 한국의 전()천년주의 개신교 공동체야말로 연구해 볼 만한 주제일 수도 있다.

 

사실 철학에서 흔하게 주장하는 인식의 표준 예라든가, 삼봉 정도전 식 종교비판이나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 식 주장 또는 조직신학자들이 흔하게 해 대는 우열이론 비슷한 그 무엇들이라면 당연히 근본주의는 비판 받을 만 하다.

 

그러나 공동체를 분석할 때 왜 철학이나 조직신학이론으로 판정받아야 하는가!

 

나는 이게 더 이해되지 않는다!

 

가령, 영혼불멸설에 대한 오스카 쿨만 식 이론이 있다. 그거 나름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현장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공헌배, <한국기독교 사상사> (파주: 한국학술정보북토리, 2014), 64-72에 나오는 5강 내세에서 혼백의 소멸로: 국조숭배에서 성현 숭배로를 따르면; 고대부터 고려 말까지 한국사회는 내세관을 가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그 내세관에 타격을 입히는 데 그게 유교적 현세관 내지 혼백의 소멸이론이다. 그러다 조선 말에는 기독교를 통해 다시 내세관이 강력하게 대두됐다. , 고대의 내세관이 다른 형태의 종교현상에서 부활했다.

 

이런 식으로 정리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조직신학 식 이론으로 하면 오스카 쿨만이 이해 될 법도 하지만 한국의 특수성에서는 내세관이 인상적으로 부각 된 저 조선 말의 놀랄 만한 사회현상에 주목하게 된 셈이다.

 

바로 이런 걸 관점의 차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소위 진보적이거나 나름 개방적으로 자부하는 조직신학자들은 마치 오스카 쿨만을 소개하면 기존의 개념에서 새로운 이론을 소개한 듯하지만 유럽 세계가 아닌, 타 문화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더 이채로울 만한 이론이 돼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 유교 식 현세관은 조선시대 동안 지속 된 관행이었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는 플라톤 식 영혼불멸설이 익숙했지만 조선 시대에는 혼백의 소멸이론이 더 익숙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근본주의를 찬성하든 비판하든 그게 우선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도전 식 종교비판이라면 이미 고려 말부터 있었던 비판일 듯하다. 그런 이성적 인식이 타당한데 왜 민중에게는 종말론이 대두됐을까?

 

이 현상을 앞 뒤 맥락 다 자르고, 옳다/그러다 식으로 판정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보다도 사회의 구조와 역사 그리고 정치적 상황 등이 있었다. 그런 요소들을 고려하여 좀 더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그래서 조직신학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이론을 소개할 수는 있지만 근본주의를 단조롭게 받아들이는 것은 별로 납득되지 않는다.

 

이는 그 반대 진영인 에큐메니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