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들에 대한 불만들

왜 이런 현상들이 생겼을까?

공헌배 | 기사입력 2020/11/03 [09:05]

목사들에 대한 불만들

왜 이런 현상들이 생겼을까?

공헌배 | 입력 : 2020/11/03 [09:05]

 

요사이 페이스북이나 인터넷 뉴스(뉴스앤조이) 등에서는 목사들에 대한 불만 또는 모 교단에 대한 비판 등이 더러 돌아다닌다.

 

필자는 신학교 다닐 때 한 학생을 만났는데; 그도 신학생일 때에는 목사들에 대해 비난했었다. 그러다 몇 년 전, 그 학생이 목사의 신분일 때 물어봤더니, 신학생 때의 그런 말들은 들을 수 없었고,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다시피 하더라!

 

어떤 목사는 자신이 목사이면서도 목사가 사람들을 세뇌시킨다는 둥, 루터의 만인사제설이 어떻다는 등의 주장들이 있다.

 

또 제법 오래 전에는 필자가 어느 목사에게 칼빈은 목사입니까 장로입니까?”라고 질문했는데, 그가 왈: 장로라고 했다.

 

나는 이를 듣고 그 교단은 신학교육의 기본도 가르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저 정도로 허술하게 가르쳐 놓고 교회로 보낸단 말인가라는 허무한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신학교 다닐 때의 어느 교수님은 다소 목사들을 폄하하듯 말씀하셨다. 그러나 정작 그 신학 교수님도 목사님이셨다!

 

도대체 왜 신학 교수님들과 목사님들과는 뭔가 마찰들이 생길까?

 

이 두 계층은 서로 협력관계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

 

도대체 어디에서 문제들이 발생한단 말인가?

 

여기서 나는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논문들을 잠깐 연상했다. 최근 한국조직신학회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철학을 주제로 학위취득 한 신진학자도 소개받았다.

 

이미 모 국립대의 교수가 비트겐슈타인의 종교관으로 논문 쓰신 일 있고, 그의 제자가 그런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일 있으며, 외국의 모 학자가 그런 주제로 책을 낸 일도 있는 듯하다.

 

그분들의 논문에 의하면; 종교는 명제가 아니라 본능행동들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사태로 판정될 만한 일들이 아니다!

 

, 종교현상에 대해 합리적 사고를 들이대는 순간 그 평가기준이 모더니즘적이거나 이상해지는 경향이 발생한다.

 

가령, 불교에서는 탑돌이를 한다. 이에 대해 명제형식의 질문을 해도 될까? 별 의미 없을 듯하다.

 

또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이에 대해 통계적 정황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그런 논문들은 본 적이 없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쓴 <샤머니즘>이라는 책이 있다. 제법 두껍다.

 

의례의 변천사나 종교의 변천사를 보면; 기독교는 원시종교에서는 좀 멀다. 다시 말해 인류의 종교무의식은 그 밑바탕에 원시종교가 있으며, 동물제사, 인생(人牲), 곡물신앙, 야생의 사고(레베-스트로스) 등 여러 개의 설명하기 힘든 내용들이 있다.

 

이 중에 기독교는 후기 종교 내지 고등종교에 든다. , 원시적 종교와는 좀 괴리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기독교는 상당히 후대에 생겼다.

 

물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에서 기독교를 원시적 무의식에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좀 후기의 종교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도 이를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쉽게 말하면 좀 더 명제화 된 종교가 기독교인 셈이다. 특히 개신교는 다른 어떤 종교에 비해도 뒤처지지 않을 만한 후기종교에 가깝다.

 

예를 들어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이 있는데, 이는 불교비판서이다. 그러나 장 칼뱅은 정도전보다 더 늦은 시기의 사람이며, 칼뱅은 많이 명제 화(?) 된 듯한 인상도 있다.

 

그리고 칼뱅보다 더 후세대인 정통주의의 시대에는 아예 스콜라 스타일을 빌려, 논박하듯 하며, 어떤 면에서는 명제처럼 말하고 싶었나 싶을 정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명제가 아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잘 알았던 것 같다.

 

반면 폴 틸릭은 정통주의를 비판했다. 틸릭은 그의 주저인 <조직신학>에서 경험을 신학의 자료로 쓰며, 인간의 신비체험들을 매우 존중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무엇이 불만일까?

 

왜 자꾸 불평하면서 갈등들을 일으킬까?

 

그리고 교회들에서는 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을까?

 

이에 대해 접근하려면, 종교·심리학적 접근 및 문화(사회)인류학의 접근 방식이 있어야 좋을 듯하다.

 

더러 윤리적 접근을 문제 삼기도 한다. 당연히 윤리문제는 해결되면 좋다. 그러나 단지 그런 문제만 있을까? 아닌 듯 싶다. 여기에는 사회의 구조적 측면, 경제적 측면도 포함된다고 여겨야 한다.

 

자꾸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불평 만 하지 말고, 직접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연구들은 누가 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신학자들이 해야 한다. 그러나 왠지 한국의 적지 않은 신학자 분들은 해외 신학의 유통업자들처럼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소개하는 일에 능숙한 듯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힘들고, 소통도 힘들 듯하다. 물론 허순길 박사님의 학위논문은 해외의 사례를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계에게 중요한 정보를 준 것이 사실이다.

 

외국의 신학자들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교계에서 더러 쏟아내는 불평들은 그 불평들에만 귀를 기울려서는 안 될 듯하다. 좀 더 심층적 연구가 필요하다.

 

연봉 높으신 신학교수님들에게 좀 더 괜찮은 연구들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종교심리학자나 사회학자 그리고 문화인류학자들과 같은 연구방법들 말이다!

 

더 쉽게 말하면 엘리아데니, 레비-스트로스니, 라깡이니 하는 학자들의 책들을 읽고 그들의 이론들을 소개하란 뜻이 아니라 그런 이론들을 기반으로 직접 조사/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현장으로 달려가야 할 듯하다!

 

두 개의 예를 들면; 필자가 읽은 논문들 중에 신학자가 쓴 논문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논문은 매우 인상 깊었다:

 

고용수, “예장교역자 수급계획을 위한 조사연구,” <敎會神學> ⅩⅦ (1985. 5): 403-460이다.

 

이 논문은 그 당시 예장 통합 교파의 전국교역자 통계 및 수급현황 등을 그래프까지 그려가면서 기초조사에 충실했던 논문이다.

 

다른 하나의 사례는 공헌배, <목사들을 위한 변호>파주: 한국학술정보, 2012이다.

 

필자는 이 책을 몇 명의 문화인류학자들에게도 주었다. 그 문화인류학자분들은 나름 흥미로운 듯 반응했다.

 

이 책이 문화인류학의 책은 아니지만 마치 문화인류학처럼 현장조사와 전통의 칼뱅주의 격률을 섞어 쓴 것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교회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