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를 깨우면 어떻게 될까?

사이비 역사에다, 과도한 망상이다. 깨우긴 뭘 깨워!

공헌배 | 기사입력 2020/06/13 [07:33]

신라(新羅)를 깨우면 어떻게 될까?

사이비 역사에다, 과도한 망상이다. 깨우긴 뭘 깨워!

공헌배 | 입력 : 2020/06/13 [07:33]

 

신라(辰韓/斯盧/新羅)는 어떤 나라일까?

 

미리 결론부터 말하면: 무시무시하고, 상상하기 힘든 잠재력들을 가졌으며, 독자적일 수도 있고, 절제되지도 않으며,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와 같은 이채로운 특수 부족들이 한반도의 동남부에 정착하면서 길들여지고, 교육받으며, 태곳적의 무의식들로부터 결별해버린 도덕지향의 부족(향토)국가였다.

 

먼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살펴 보자:

 

신라 초기의 의복제도는 그 색깔을 상고할 수 없다. 23대 법흥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6부 사람들의 의복의 색깔과 존비(尊卑)의 제도를 정했으나 오히려 이것은 오랑캐(우리 나라) 풍속이었다. 진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2(648)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서 당나라의 의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청했는데, 태종황제가 조명(詔命)으로서 이를 허락하고, 겸하여 옷과 띠를 내려주므로 마침내 돌아와서 시행하여, 오랑캐 풍속을 중국 풍속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4(664)에 또 부인들의 의복을 개혁했는데 이후로부터는 의관(衣冠)이 중국과 같아졌다(金富軾, <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 “色服.”).

 

그래서 법흥왕은 신라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로 동화(同化)시키는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즉 법흥왕이 의복을 바꾸어 보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지만 김춘추(무열왕)의 시대에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여 의복이 중국()과 같아지도록 하였으며, 마침내 문무왕 4년 이후부터는 의관(衣冠)이 중국()과 같아졌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인상 깊게 볼 것은 김춘추이지만 왜 하필 김부식이 신라의복의 중국화를 말하면서 그 기원을 법흥왕으로 잡았느냐에 있다. 이는 아마도 법흥왕의 정책에는 어떤 식으로든 중국화와의 연관성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법흥왕이 어떤 왕이었는지는 학계에서 많이 주장해왔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그는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했으며, 사로국의 유목 식 문화들을 뒤엎고, 중국식을 추진한 왕으로 나는 한반도 역사에 있어서 법흥왕부터가 진짜 신라라고 해석한다. 엄격하게 말해, 법흥 왕 이전에는 신라가 아니었다. 기록 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한반도의 신라화는 법흥왕 때부터 추진 된 것으로 여긴다.

 

그러면 도대체 김춘추는 어떤 왕일까?

 

20081129(), KBS 1TV에서는 한국사 전()’을 방영했는데, 거기에서 문무왕의 능비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이것은 마치 김운회 교수의 글을 연상케 했다.내용도 비슷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토요일에 방영 된 그 프로에서는 마치 중국의 북동부에 살았던 수 만 명의 알타이 종족이 배를 타고 한반도 동남부로 간 것처럼 보이게끔 되었는데(실은 그걸 주장한 것은 아님)비해, 김운회 교수는 가족사(“일족들은”)로 묘사했다.그래서 실은 김씨 일가의 일부가 사로국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이 탈해 이사금과 협력했다는 것이 김운회의 주장이었다.그리고 김운회와 그 날 방영된 프로에서는 모두 김씨 일가의 신라국 진입을 말했지만 이는 잘못인 듯하다. 그 당시 한반도의 남동부에는 신라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김씨 일가는 사로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또 수도의 지명으로 중국에 있었던 금성을 말했는데 이 역시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 이유는 원래의 국명은 금성이 아니라 서라벌혹은 계림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문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내용이 나타난다.그러나 이는 성()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원래 나라를 세울 때 붙여진 수도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금성이라는 지명은 탄생설화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므로 만약 김알지 설화와 연관을 지으려 한다면 적어도 혁거세 이후에 전해졌을 이름일 것이다. 아마도 탈해 이사금은 혁거세 보다는 후대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혁거세 시대에 이 이름 금성을 썼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김운회의 주장처럼 김일제의 후손이 탈해 이사금과 협력했다면 그 일족은 그다지 큰 세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히 경주 김씨를 말하면서 신라 왕족을 말하는데, 엄밀히 말해 김씨 우두머리는 이사금 시절이 아닌 마립간시절의 명칭이었다. 마립간시절이 김씨 왕조였을 것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왕이 아니었지만 그렇다. 따라서 김알지는 사로국의 왕족도 아니었으며, 그 시절에는 왕정을 한 것도 아닌데, 특이하게도 탄생설화가 두 개(혁거세와 김알지)나타난다는 것은 두 가지의 전승이 편집되었음을 드러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날 KBS에서 방영한 내용을 따르면, ‘문무왕은 자주적이고, 알타이(흉노) 계통의 전통을 강조하기를 원했다라고 했다. 하지만 후기 신라의 어떤 모습이 알타이 적이었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사로국 시절의 마립간 전통을 부활시켰다든가, 적석목곽분을 재현했다든가, 토용이 아닌 토우를 되살렸다든가, 신라 왕조 때문에 사라졌던 사로국 시절의 알타이 문화를 재해석했다든가 하는 등등의 사건들이 규명되어야 그 주장은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KBS에서는 그걸 증명해 내지 못했다. 한반도의 흉노(Huns)에 연관 된 김운회의 주장을 살펴보자.

 

김운회 교수의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서>에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한 까닭에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2, 351).”

 

이는 휴도왕이 성()을 하사 받은 이유에 대해 진술한 것이다. 그 까닭은 제사를 할 줄 알았다는 또는 하늘을 우러러 볼 줄 알았다는 또는 제의적 전통을 가졌다는 등에 있었다. 그러나 그 제사가 어떤 유형의 제사인지는 잘 모른다. 유목적 제사인지 농경적 제사인지 조상제사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휴도 왕 김일제의 후손이 설령 한반도의 신라로 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훈족(흉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간직했을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김운회의 공헌은 문무왕의 능비를 통하여 고서에 나오는 휴도왕이라는 특이한 정체에 연관하여 해석해 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즉 신라사의 근원에 대해 중요한 가설 하나를 제시한 셈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라 이전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사로국의 적석목곽분은 한국사학계에서도 종종 조명되었다. 한국사학계에서 자주 주장되었던 경주의 적석목곽분에 대한 주장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4세기 중엽에 奈勿王(356-402)이 등장하면서 金氏 세습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새로운 왕조는 종래의 尼師今이라는 王號 대신 최고의 首長이란 뜻을 가진 麻立干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칭호는 530년대 초에 漢式太王號로 바뀔 때까지 150년 이상 사용되었으므로 이 기간을 흔히 마립간시대로 부르고 있다. 이 시대에 역대 왕과 그 일족들은 積石木槨墳을 만들어 썼는데, 몽골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이 특이한 墓制와 또한 거기서 출토되고 있는 북방 계통 유목민족 특유의 유물에 근거하여 일부 연구자들은 김씨 왕조를 북방 유목민족 출신에 의한 정복왕조가 아닐까 주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 마립간시대에 사로국은 일약 신라로 비약했는데, 사실 그만큼 이 시대는 신라 역사상 보기 드문 격동기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7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97), 3).

 

뭐 그래서 사람들은 더러 신라=몽고 식의 도식으로 설명하기도 하던 데, 나는 이와 같은 가설들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몽고족에 대해 과대망상이나 우상시하는 사유(思惟)들은 바람직하지 않다. 몽고의 민속촌을 가 본 사람들은 몽고인들이 무덤문화를 발전시키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유목민들은 토기나 화려한 무덤을 만드는 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습속을 가질 수도 있다. 몽고 지역에 있었다고 하여, 그게 무조건 몽고인들의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비약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근래 학계의 설들에 의하면, 김춘추나 문무왕은 휴도왕 김일제, 즉 흉노족(Huns)의 후예라는 뜻이다. 그런데 김부식의 기록에 의하면 그 훈족의 후예인 김춘추는 훈족적 행태는커녕,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최치원의 진술에 의하면 당나라의 황제에게 개와 말의 성의로써 조알하던 그런 왕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왜 신라에서는 이와 같은 대극적(對極的) 사태들이 발생했을까? 최치원의 주장을 따르면, 자신의 조국 신라에서도 도적 떼가 출현했거나 무질서해 보이거나 어려운 때가 있었던 것 같다(자세한 내용들은 여기서 소개하지 않겠다).

 

위에서는 정사(삼국사기)를 인용했는데, 이번에는 야사를 인용해보겠다.

 

이종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에는 신라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부터 분명히 하기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22세 양도공 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진평왕과 보명 사이에서 출생한 양명공주가 아비가 다른 자신의 아들 양도와 딸 보량을 혼인시킬 때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써 하겠느냐라고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국의 도는 신라의 풍속을 의미하는데, 신라에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오랑캐의 풍속에 속하는 풍속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화랑세기>에 나오는 남녀관계를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관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종욱,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서울: 김영사, 2000), 72).

 

미실의 어머니는 묘도이고 아버지는 미진부이다. 묘도의 어머니는 옥진인데, 칠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자기의 지아비인 영실이 아니라 법흥의 아이를 낳으려 한 사실이 주목된다. 우리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도덕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다(Ibid., 74-75).

 

(법흥)제가 무슨 꿈인가?’ 물었다. 답하기를 칠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법흥)제가 웃으며 ‘7색은 섞인 것이고 새는 여자다. 빈첩의 조짐이다. 네 지아비와 더불어 함께 하라하였다. 옥진이 기뻐하지 않았다. (중략) 옥진은 법흥제를 신통스럽다고 여겨 묘도라 이름 하였다. 묘도가 자라자 법흥제가 약속한대로 사랑을 하였다. 그런데 (성기가) 작고 좁아 맞지 않았고, (법흥)제가 양기가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묘도는 저녁이 되면 괴로워하였다. 이에 법흥제가 자주 사랑하지 않았다. 그때 미진부 공이 어머니 삼엽공주와 늘 궁중에서 입시하였다. (중략) 옥진부와 미진부 공이 바야흐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중이었다. 옥진 궁주는 이에 기뻐서 알려주며 너희 부부는 이제 귀녀를 낳을 것이다.’ 과연 미실을 낳았다(Ibid., 73-74).

 

이 대목은 <화랑세기>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미진부는 남모공주를 잃은 후 다시 혼인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왕실의 외손으로서 궁중에서 법흥대왕을 모시다가 후궁인 묘도(妙道)부인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게 되었다.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터에 지소태후가 이 사정을 알고 허락하여, 마침내 묘도부인과 결혼하였다. 그리하여 미실(美室)낭주와 미생랑을 낳았다. 미실 낭주는 재주와 용모가 남보다 뛰어나 진흥왕과 진평왕을 모시면서 총애를 받았고, 미생랑 또한 화랑에 들어갔다(金大問, <花郞世紀>, 第一部 花郞世紀, “二世 未珍夫.”).

 

이는 법흥왕의 후궁이 미진부와 사통하여 낳은 딸이 미실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유교의 도덕관으로는 옳지 않다.

 

6세 풍월주 세종 조에는 미실이 진흥왕을 색공으로 모셨으며 음사(陰事)를 잘하여 황후궁 전주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이종욱, 83).

 

미실은 사다함, 세종, 미생, 하종, 보종공 등 다섯명의 풍월주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생 대에 나뉘었던 화랑도의 다섯 파 중 대원신통을 받들려는 한 파를 만든 중심인물이 되기도 하였다(이종욱, 87).

 

이를 따라서 볼 때 고대의 신라는 남녀의 성()관계가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사로국의 토우들을 관찰하면, ()이 부각됐다. 놀라운 것은 사로국의 토우들 중에는 개미핥퀴도 나오는 데, 이 생물은 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한다. 즉 한반도의 생물이 아니다.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터키석도 나오고, 아메리카의 그 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은 물질로써 만들어진 유물도 있다(서아시아 지역에서 출토 된 성분이라 함).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서 최초로 발견한 것처럼 주장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자유분방하고, 통제되지 아니하며, 무시무시한 이 부족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에 맞설 수 있는 이념으로는 중국에서 베껴 온 유가철학(儒家哲學)이 적합하다고 통치자들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의식론(儀式論)이 발달 된 주자학이 더욱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즉 유가철학들 중에서도 주자학, 즉 의식론의 세뇌와 이에 따른 도덕론의 주입 식 교육들은 야생마와 같은 사로/신라의 부족들을 길들이기에 상당히 괜찮을 법 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김운회의 주장을 들어보자:

 

금 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은 금 나라의 실록인 <금사(金史)>에서는 금 나라 시조는 그 이름이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나왔다(金之始祖(후략) <金史> 本紀第一, 世紀)”고 합니다.(중략) <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금 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이란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女眞酋長乃新羅人(후략) 洪皓 <松漠紀聞>)”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료인 <고려사(高麗史)>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1, 356-357).

 

1778년 청() 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황명(皇命)으로 펴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금 나라의 시조 합부[哈富: 또는 힘보(函普)]께서는 원래 고려에서 오셨다. <통고(通考)><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시조께서는 본래 신라로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대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와 금()의 역사를 보면 이 두 나라가 종종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중략)”라고 합니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1, 357).

 

경주 김씨는 후에 금태조(아골타)-후금태조(누르하치)로 이어져 중국을 정벌하여 쥬신 천하를 열게 됩니다. 금 나라와 청 나라 황실(淸皇室)은 유난히 정신적으로 신라(新羅)와 가까웠습니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1, 370-371).

 

그렇다면 결국 전금(前金)을 세운 완안의 추장 아골타는 신라의 후손이라는 뜻이 된다. 즉 중세기에 북송(北宋)을 오랫동안 지배하였던 그 대제국이 신라의 후손에 의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고백적으로도 그 금나라가 신라를 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더욱 놀라운 건 후금(後金)이다. 후금의 추장은 아이신죠로 누루하치인데, 바로 그 후금이 후에는 청()이 된다. 바로 그 청이 마침내 만리장성을 넘어 지나()200년 이상이나 지배하였다. 적어도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청나라는 건재하였다. 그리고 신해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비록 일본의 도움을 얻기는 하였지만 마지막 황제이자 초대황제인 아이신죠로 푸이는 건재하였다. 단 소련이 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만주제국으로 진출하지만 않았어도 만주제국은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일본은 만주제국을 끝까지 보존해주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신죠로 푸이는 일본을 많이 의존한 편이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그 신라인들이 한반도에서는 길들여 진 나약한 왕족들 내지 귀족들이었지만 만주로 진출했을 때에는 금나라를 세우고, 그 중국(/)을 수백년씩이나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중국인들에게 호복을 입히고, 머리를 변발(辮髮)로 만들었다(나라 때).

 

이상하지 않은가?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교육받은 왕족으로 있었을 때에는 당나라에게 개와 말의 성의로써 조알했고, 백제를 무너뜨리고서도 거의 백년 가까운 세월동안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반목하면서, 전전긍긍하다가 겨우 당나라를 물리친 그 신라가, 그 왕족이나 귀족이었을 법 했던 그 신라 사람들이 만주(滿洲)로 갔더니, 야인들처럼 지내다가 나라를 세우더니, 드디어 송(: China)나라를 반토막 내서, 그 북쪽을 다스리지 않았는가? 이게 왜 이럴까? 한반도에서는 조막만한 나라를 유지하기에도 급급하여, 절절매던 그 왕조가 만주로 갔더니, 호랑이가 되지 않았는가?

 

경북 출신으로 여겨지는 세 명의 걸출한 교육받은 학자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김부식이다. 이는 경주 출신으로서 <삼국사기>의 저자이며, 묘청 세력을 축출하는 데 앞장 선, 개경파의 대부이다. 박용숙의 주장을 따르면, 묘청은 신라의 선파(仙派)를 계승한 서경(평양)승려였는데, (여진족)을 지배하고 싶어, 뭘 어찌 해보려다, 개경파에 밀려, 죽은 사람이다. 훗날 단재 신채호는 이 사태를 반만년 이래, 최대의 사건으로 볼 만큼 중요하게 다루었다. 바로 그 묘청에 맞섰던 자는 경주 출신의 학자 김부식이었다. 아마 김부식도 유가철학적(儒家哲學的)성향이 좀 있었지 싶다.

 

둘째, 일연이다. 이 사람은 아마도 경북 경산 출신이었던 모양인데, <삼국유사>의 저자로서 승려였다.

 

셋째, 삼봉 정도전이다. 아마 경북 영주 출신이었던 모양인데, 머리에 먹물이 가득 든 우수한 학자다. 조선 개국공신으로서 장군 이성계를 설득하여, 회군을 종용하였고, 맹자, 공자 등의 걸출한 유가철학자들을 신처럼 떠받들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때에는 악독할 정도로 몽고를 싫어하여, 유배까지 간 뼛속까지 친중사대적 모화관(親中事大的 母華觀)’에 세뇌되어 있던 골수 유학파(儒學派).

 

다시 김춘추와 문무왕을 생각해보자, 흔히 문무왕 하면 바닷 속 수장(장례)을 연상하는 데, 그 수장은 화장(火葬)으로 여겨진다. 즉 사로국처럼 적석목곽분 식이 아니라 불교 식 장례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김운회나 KBS처럼 문무 왕 알타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주장들은 몹시 추상적이다. 김부식의 주장처럼, 그 왕(문무왕)도 친중사대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무왕 때에 신라의 의복들을 완전히 중국 식으로 뜯어고쳤다고 하지 않았는가! 설령 신라의 비문에서 휴도 왕 김일제를 유추할 만한 문장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것 하나만으로 문무왕=알타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은 웃길 일이다.

 

그리고 김춘추도 휴도왕의 후손 어쩌구저쩌구 할지 모르겠는데, 그의 조상이 누구였던 간에 김춘추의 선택은 최치원이 기록한 대로, 개와 말의 성의로써 당나라의 황제에게 조알한 찌질한 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무시무시하고, 가늠할 수 없을 만한 종족들일지라도 한반도로 정착하여, 기득권(또는 귀족)이 되면, 길들여지는 순한 양이나 털 깍이는 초식성 동물들처럼 변해버린다.

 

소위 휴도왕이니, 훈족(Huns)이니 해가면서 가정해 보자, 훈족들은 불교를 공인한 부족이 아닐 것이다. 훈족은 유가철학(儒家哲學)에 길들여진 부족도 아닐 듯하다. 훈족은 가늠하기 힘든 종족이다. 그들은 세뇌되지 아니하고, 교육받지 못한 투박한 종족들이었을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이체의 말을 상고해 보자:

 

순수하게 도덕적인 가치 정립(이를테면 불교의 그것처럼)은 어느 것이나 니힐리즘으로 끝난다. 이것은 유럽에서도 기대할 수 있다!(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이체/ 강수남 옮김, Der Wille zur Macht, <권력에의 의지> (서울: 청하출판사, 1988), 1유럽의 니힐리즘” 19, 39).

 

니이체의 말을 더 들어보자:

 

법관들이여,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사제들이여! 그대들은 제물인 짐승이 수긍해야만 그것을 죽이는가? (중략) 나의 자아는 초극해야 할 어떤 것이다(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이체/ 정성호 번역센터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오늘, 1993), 50).

 

초인이란 인간이라는 암흑의 구름을 헤치고 번쩍이는 번개이다. 그러나 나와 인간들과의 거리는 아직도 멀다(Ibid., 26).

 

그대들은 그 범죄자를 이라고 해야 하며, ‘악인이라고 해서는 결코 안 되리라. 또한 병자라고 해야 하며 비열한 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자라고 말해야 하며 죄인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Ibid., 51).

 

니이체의 개념에 있어서는 이라든가 이라든가 법률이라든가 종교의 도덕같은 것들은 버리거나 극복해야 한다. 즉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 서 버렸다. 관습이라든가, 기존의 가치 등등은 초인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런 관념들이나 관습들은 소인배들의 작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니이체는 다른 것을 기대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 소인들은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기심을 가질 권리도 힘도 없다. 그대, 창조자들이여! 그대들의 이기심 속에는 잉태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세심한 배려가 깃들여 있다.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열매를, 그대들의 완전한 사랑을 감싸고 귀여워하고 기르는 것이다.(중략) 그대들의 사업, 그대들의 의지야말로 그대들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거짓된 가치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Ibid., 359-360).

 

즉 니이체는 의지를 중요 시 했다. 니이체의 주장대로 한다면 기존의 가치, 이를테면 종교라든가, 겸손이라든가, 윤리라든가, 선행이라든가 희생 등등은 의미가 없다. 그런 것들은 속임수이거나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물으나 마나다. 의지나 힘이다. 그런데 의지나 힘이 아주 잘 통하는 곳은 동물의 왕국이다.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맹수는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 동물들은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중세에는 게르만 족을 이동하게 하였던 이른 바 훈족(Huns)’이 존재했다. 그리고 도스또옙스키의 소설에는 잔인한 터어키인들의 예화가 나온다.훈족이나 터어키족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본능에 충실했거나 자신들의 의지에 충실했을 것이다.

 

역사의 경험을 따를 때, 인간이 도덕의 주체로 선다거나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일은 심히 불안하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인간은 어디에 의존하여 안보(security)에 대한 요청을 받아야 하는가?

 

다시 훈족(Huns)버전(version)으로 돌아가 보자, 무시무시하고 가늠할 수 없는 그 종족의 일파가 한반도의 동남부로 이사 와서, 기득권이 되었다고 소설을 써보자,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가능하다: 훈족으로 부활할 것인가? 아니면 길들여지고, 교육받으며, 문명들의 수혜에 젖어들면서 선()주민들의 문화에 융화되고, 자신들의 태곳적 기억들을 몰살한 뒤, 문명인으로 세뇌되어 살아갈 도덕적 인간들이 될 것인가?

 

아마도 한반도의 신라 사람들은 후자(後者)를 택한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깨워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잠재워서 죽여 버려야 할까?

 

그들에게 있어서 태곳적의 기억이니 무의식이니 하는 등등의 주장들은 너무도 괴롭고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천천히 잠재워서 죽도록, 다시 말해 잊어버리도록, 놔 두는 편이 그들에게는 월등하게 행복한 일 아닐까?

 

이와 같은 글을 쓰는 나도 참 짓궂다. 외골적 성향이 강한 한국인들에게 도대체 내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내가 신학만 공부하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 데, 나도 참 괴롭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 보자, 니이체가 주장한 대로 우리는 초인들을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도덕의 계보들에 빠져, 지식유희들에다 철학적 사유(思惟)들을 즐기며 살아야 할까?

 

니이체의 철학은 힘 철학이다. 힘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힘을 잘못 쓰거나 그 힘들의 방향을 잘못 정해버리면, 헛수고가 되고 만다. 힘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힘이 절제되거나 통제되지 못한다면 그 힘들은 매우 위험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 신라(辰韓/斯盧/新羅)를 깨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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