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 교수에 대하여

윤리는 손 교수의 독점물이 아니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9/05 [15:10]

손봉호 교수에 대하여

윤리는 손 교수의 독점물이 아니다!

공헌배 | 입력 : 2019/09/05 [15:10]

 

손봉호, 박득훈, 홍인식. 이 세 사람은 명성교회를 비판했다는 데 있어서 공통성이 있다.

 

손봉호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들이 소위 돈에 노예가 됐거나’ ‘돈을 사랑하는 듯이비판한다. 박득훈은 <돈에서 해방 된 교회>라는 책을 썼고, 홍인식목사는 아예 라틴 아메리카까지 가서 <해방신학>을 공부하고 온 사람이다.

 

물론 해방신학은 가난을 주제로 했고, 칼 맑스적 사회혁명론조차도 기독교의 신학에 접목시킬 정도로 특이한 상황신학이다.

 

왜 이분들이 명성교회를 표적으로 삼아, 비판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좀 놀랍기도 하다.

 

손봉호는 철학과 윤리전공자라는 점에서 아마도 윤리, 그것도 돈을 주제로 윤리적 투사(投射)로써, 명성교회를 공격한 듯한데, 왜 하필 명성교회를 표적 삼았는지, 아니면 명성교회가 손봉호에게는 좋은 타깃인지, 아니면 손봉호 자신의 윤리적 잣대를 위한 표적으로 적합한 모델이어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손봉호 교수는 일인시위까지 할 정도로 명성교회를 비판한 사람이다!

 

대단히 송구한데, 한국의 수많은 교회들은 자칭 윤리가들의 표적들이 아니다!

 

당연히 한국의 그 수많은 교회들도 그 수많은 신학자들의 요청들을 받아주어야 할 투사물(投射物)들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누가 그대들에게 윤리선생으로서 우리들의 심판자가 돼 달라고 요청했으며, 무슨 권리로 방송출현을 통해, 윤리비판들을 해댔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그냥 그대들의 직책에 어울리도록, 학교의 강단에서 실행하는 학생들과의 점수놀이(학점매기기)를 즐기시길 바란다!

 

나는 그분들을 우리의 심판주로 요청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소위 윤리에 대해 조금 살펴보자;

 

윤리라는 말의 어원인 에도스에는 어떤 것들을 반복하여 실행하는 사태들 또는 사회적 관습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사실 따져보면, 윤리의 원본적 동기는 터부들로부터 기인한다. , 윤리는 터부들의 발전 된 행태 또는 터부들의 변형 된 행태라고 생각한다.

 

윤리는 복합적이고, 워낙 다양한 편이라 어디든 갖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다형적(多形的)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윤리, 불교윤리, 이슬람교 윤리, 유교윤리, 가정윤리, 어른윤리, 아동윤리 등등.

 

그렇다면 그 많은 윤리들 중, 명성교회에게 적용한 윤리의 틀(tool)은 무엇인가? 기준을 모르겠다!

 

막연하게 느끼기에는 에 대해 윤리적 기준을 댄 듯한데, 추상적이라 알아듣기 힘들다! 그리고 그대들이 제안한 그 비판들을 왜 들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단지 그대들의 사회적 신분이 좀 높다고 하여, 그대들이 명성교회의 심판주나 윤리의 기준이라도 된 줄 여기는가!

 

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에 관심 있는 듯 하여, 돈과 연관 있는 경제를 주제로 아주 조금 발성하겠다.

 

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인간의 경제를 주제로 책을 썼고, 한국어로도 번역 됐다(박현수 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근대와 근대이후 그리고 사회와 경제와의 관계(비중; 영향력)이다.

 

()근대 식 농경 또는 수렵채취 사회나 근대 이전의 패러다임에서는 경제라는 영역이 사회 안의 한 분야일 뿐이었다. , 다양한 요소들 중에서 경제도 그 중 한 요인일 정도로 그 분야들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경제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져, 경제와 사회(문화), , 경제=전체사회라고 할 정도로 경제와 사회가 대등해질 정도로 경제가 큰 영향력을 발휘한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경제가 사회전체를 역전했다. , 사회는 경제에 종속 될 정도로 경제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칼 폴라니가 본 패러다임의 전이(변동).

 

오늘날의 사회는 이윤 지향적이며, 사람을 도구(수단)로 사용한다. 분업화 되었고, 도시사회가 매우 발달했다. 바로 이 도시사회들에서의 소통수단이 이다.

 

물론 사회계약들이 무너지면 돈들은 종이쪼가리들에 불과하겠지만 아직까지는 돈을 교환수단으로 쓴다.

 

이것이 이 시대의 정신 또는 이시대의 문화다!

 

여기서 교회만 예외적으로 살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한가?

 

다시 말해 교회 혼자 사회와 동떨어져 덩그러니 혼자 살 수 있는가?’ 이 말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돈, 돈 하면서 교회들을 비판하는지 도무지 의아하다!

 

대관절 이 시대의 교회들은 돈을 교환수단으로 쓰지 않고, 무엇을 사회적 교환수단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물물교환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왠지 그분들의 말들을 들으면, 쾌케묵은 말씀들을 하시는 듯하여, 납득도 힘들고, 놀라운 것은 명료성이 약하여, 알아듣기에 여간 어렵지 않다.

 

다시 윤리적으로 들어가 보자;

 

윤리는 매우 다양하며, 윤리는 매우 상대적이다!

 

가령,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를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이 기준을 대한민국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 이슬람교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음식관습은 매우 비()윤리적이다!

 

내가 듣기로 일본에는 남녀 혼탕(목욕탕)도 있다고 하던데, 이게 대한민국에서 납득될 만한 윤리인가?

 

조선시대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던데, 요새도 그런가?

 

<소학언해>를 따르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하던데(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요새도 그런가? 미용실에도 가지 말아야 하겠네?

 

쉽게 말해, 동일한 공간대에서 조명하더라도 통시적으로 살피면, ‘윤리는 기준자체가 달라진다! , 같은 국가라 하더라도 200년 전과 지금은 그 윤리의 기준이 다르다! 백 수 십 년 전의 미국에서는 노예제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동일한 국가라 하더라도 제도와 인식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보더라도 상황은 다르다! 백 여 년 전의 한국 장로파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가 그 치리 사유들이 같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백 여 년 전의 한국교회를 기준 한다면, 오늘날의 한국 장로파 교회들은 치리가 실종 된 사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동일한 뿌리를 갖는 교파들이라 하더라도 기준들이 다른데, 하물며 이게 지역이나 인종 그리고 시간대가 바뀌면 윤리라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난다.

 

도대체 손봉호, 박득훈, 홍인식 등은 무엇을 기준으로 그토록 명성교회를 비판했는가? 그 기준들이라도 좀 듣자!

 

정말, 짜증난다!

 

왜 자꾸 사람들을 선동하는가?

 

그냥 그대들의 직책에 어울리게 학교로 돌아가서 학생들과의 점수놀이에 충실할 생각들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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