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무엇인가?

어떤 학자들과의 대화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7/06 [22:30]

운명이란 무엇인가?

어떤 학자들과의 대화들

공헌배 | 입력 : 2019/07/06 [22:30]

 

운명은 존재하는가?

 

형이상학적 실재나 확률과 같을지 모르겠는데, 운명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국 신학자 폴 틸릭의 주장을 들어보자:

 

자유와 운명

 

질문: 당신은 자유와 운명이 창조적 힘 또는 인간의 활동과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틸리히 박사: 글쎄,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당신의 그 말은 두 가지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203/204]

 

질문: , 맞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무엇입니까?

 

틸리히 박사: , 나는 진술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웃음) 존재의 한계가 없는 것이 절대적 자유입니다. 모든 존재의 한계는 그의 존재 안에 끼워 넣어진 것입니다: 이름, 그의 부모, 그의 재산, 그의 나이, 그의 출생지,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주변에서 생긴 것들, 지나가는 날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하나의 분자(원소)가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일컬어 운명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 운명은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그것을 죽음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라틴어 “fatum”으로부터 유래한 부정적 뜻입니다. 이 의미는 어두운 힘입니다. 운명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힘이라는 의미로 가득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 모든 것은 굳어버리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 안에 반응하게 하는 모든 원초적 힘이 있습니다.(중략) 그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느낌이 몸에 영향을 줍니다. 달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나는 자유로 부릅니다.

 

이 문제는 운명인지, 우리의 정신적 구성인지는 가늠해 봐야합니다. 이것은 자유를 가로막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그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참을 요청하는 우리 자신이 모순이기 때문입니다.(중략) 운명은 논리의 법칙이 아니고, 개인의 경험입니다.

 

우리는 자유 합니다. 우리는 모든 원초적 중심의 가능성을 가져왔었고, 우리의 운명에 대해 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의 자아(ego)” 또는 우리의 자아(self)”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매우 불()분명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중심을 부를 때 이 자아중심은 우리가 의도하고, 우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행동이 만약 의도와 결정이라면-또는 직유적인 또 하나의 반응-우리의 중심인 자아가 우리의 중심에 있을 때 나는 자유로써 결정짓습니다. 자유는 결정주의와 비()결정주의의 인기 있는 토론이 아닙니다. 이것을 일컬어 의지의 자유로 부릅니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총합적 반응이고, 우리는 자유하다는 것뿐 아니라 우리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말은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포함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우리의 뇌와 우리 자신의 실존까지 포함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지속적으로 혼합됩니다. 아마도 그 자신은 살아가면서 자유를 그의 삶의 가장자리로 밀쳐 넣을 것입니다. 이 가장자리는 매우 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우리의 가능성이 만들어집니다.

 

사람은 창조적 자유를 가집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근본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근원적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될 때 그것은 반드시 우리 안의 그 어떤 유비를 가집니다. 우리는 또한 창조적 순간을 경험합니다. 창조의 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해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 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이 이해는 중심반응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중심반응은 자유입니다. [204/205](P. Lefevre ed., The Meaning of Health: Essays in Existentialism, Psychoanalysis, and Religion (Chicago: Exploration Press, 1984) ).

 

* 번역이 엿 같겠지만 양해 바랍니다. 제가 무식해서요! 아니면 폴 틸릭의 말이 난해하거나 혹시 그 책을 갖고 계신 분께서 더 좋은 번역으로 코멘트 해주셔도 좋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즉 폴 틸릭은 자유가 가능하다고 여긴 듯하다. 그러나 공헌배는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지만 자아는 확률을 조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세계는 개인의 자아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는 확률의 바다() 가운데로 내동댕이쳐져 있다. 예를 들면, 통계는 예측을 위한 자료로도 쓰인다. 그리고 확률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들 중,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한 개의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여 세포분열을 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그 희박한 확률 가운데 생명이 탄생한다. 가령, 미국이나 영국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날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 또한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날 확률은 몇 퍼센트 일까?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이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사람들은 출생부터 확률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라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확률이다. 자라면서 연인을 만나는 것도 확률이다. 그런데 그 확률이 인생을 결정해 버린다. 병에 걸릴 확률, 사람을 만날 확률, 출세 할 확률, 돈을 벌 확률, 시합에서 이길 확률 등등 모두 확률이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날에 L이라는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할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 만일 이 사건을 확률적 계산으로 제시하려면 희박하기 그지없는 경우의 수에 든다. 그러나 그 희박한 경우의 수, 즉 확률적으로는 제시되지도 않은 그 희박한 사건 때문에 사람들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공헌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통해 본 신정론 비판,” <한국조직신학논총> 42 (2015. 9) ).

 

아래는 공헌배가 모 조직신학 교수와 대화한 내용들 중 일부이다. 그 조직신학 교수는 세계적 명문대에서 세계적 석학에게 사사한 사람이지만 실명을 공개하지는 않겠다:

 

모 교수: 운명? 그런 게 있다면 거지같은 거겠지요. 없어요. 그런 거.

공헌배: 아뇨, 그 생각은 모더니즘적 사유에요.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발상입니다.

 

: 그냥 없다고 하고 싶어요. 있다면 짜증나니까!

: 그래서 제가 폴 틸릭조차도 하급수로 봤던 거에요. 질문을 제대로 읽지 않으셨네요.

 

: 흐흐 그거 길어서 눈에 안 들어와요. , 봄이 왔네!

: 교수님의 책에도 나옵니다. 니이체는 형이상학을 공격했다. 운명은 형이상학적 사유체계로서의 비논리이고, 물리학은 자연과학적 사유체계로서의 비논리에요. 무엇이 더 우월한가요? 비트겐슈타인이 여기에 우월등급이라도 매기던가요?

 

: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 말돌리기! 이거 제가 학벌 좋은 교수들에게서 자주 목격했습니다.

 

: 인생? 제가 논문에서 아주 짧게나마 이야기 했을 텐데요? 확률의 바다 가운데로 내동댕이쳐져 있는 그 무엇이다!

 

: 거 저는 심각하게 말씀드리는 건데요!

:

 

: 운명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교수들이 아니라 점장이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투는 점장이 투에 더 가깝습니까 대학 교수들의 투에 더 가깝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제가 답하지 않아도 교수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모든 교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제가 만난 교수들은 본질적 문제들을 짚어내지도 못한 듯 했고, 사유가 깊지도 않은 듯 했습니다.

 

그저 교수들에게 물어볼 만 했던 것은 주로 테크니컬한 주제들 밖에 없었습니다.(중략) 제가 경험한 교수님들은 주로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소경 된 인도자들이라고 했을까요?

 

잘 차려놓은 밥상과 같이 정리 된 언어들로 예리하게 질문해내지 못한다면 교수들로부터는 답을 얻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에게는 그런 정도로 질문할 능력이 없습니다.(후략)

 

그리고 아래는 서양철학 전공한 교수에게 공헌배가 질문한 내용이다. 역시 실명은 공개하지 않는다:

 

교수님의 전공이 철학이시니까! 철학적으로 질문해도 되겠지요? 저의 논문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통해 본 신정론 비판에도 조금 나옵니다.

 

운명이 있는가? 폴 틸릭은 운명을 신학의 주제에서도 다룹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운명을 비논리로 여긴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법칙조차도 비논리에요. 둘 다 비논리입니다. 이를 역으로 들으면 자연현상도 통계이고, 운명도 통계에요. 근대 서양인들은 자연현상을 법칙처럼 받아들였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자연에는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고대인들은 운명 앞에 멈추어 섰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현상과 운명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즉 근대 서양인들은 자연현상을 이론화하여,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순응하기도 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뭐지요?

 

이런 분야는 폴 틸릭보다 비트겐슈타인이 월등하게 예리한 것 같습니다. 운명은 메타피직스이고, 자연과학은 피직스이다! 이렇게 결론내면 되는 가요? 제가 전에 말씀 드린 것 같기도 한데, 1970년대에 서울대를 졸업한 사람이 이화여대를 졸업한 여자와 혼인하는 것은 법률 상 제정된 규칙도 아니고, 논리도 아닙니다. 다만 그런 혼인이 성립될 확률이 더 높아질 뿐입니다.

 

키 작은 유전자로 배열 된 키 작게 태어난 아이가 배구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법률도 아니고, 논리는 더 더욱 아닙니다. 다만 그럴 확률이 높을 뿐입니다. 그런데 키 작은 유전자는 부모로부터 받은 거에요. 다시 말해 자신이 선택해서 고른 게 아니라구요! 이와 같은 걸 일컬어 숙명론적 또는 운명론적으로도 부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에 의하면, 공부 잘 하는 사람은 부모로부터 공부 잘 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유전자의 배열이나 부모는 확률이지, 논리가 아니라구요!

 

심지어는 꼭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엄청난 차이까지 납니다. 저의 동생은 명문대 출신에 세계 100등 안에 드는 대학교의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저는 전혀 아니거든요!

 

공부 잘 하는 사람과 공부 못하는 사람과의 차이를 유전학적으로 한다면 너무나 미세한 차이여서 현대의 유전학으로는 구별도 못할 만큼 미세하다고도 하지만 그 미세한 차이가 인생을 판이하게 만들어요. 물론 이는 논리가 아니라 확률이겠지요?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그런 걸 잘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얼굴 이쁜 여자와 그렇지 못한 분과의 차이를 현대유전학으로 구별할 때, 도대체 염색체의 배열이나 유전자 정보에 있어서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요? 이게 유전학적으로 분류 될 만한 우열의 이론이라도 될 수 있나요? 그러나 분명 얼굴 이쁜 여자와 그렇지 못한 분과의 인생은 판이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 역시 논리는 아닙니다.

 

다시 묻습니다: 저의 질문이 어렵습니까? 철학으로 일반인들한테 강의까지 하시는 분이 왜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바쁘십니까?

 

그 교수 왈: , 교수님 질문이 너무 어렵습니다^^ 제발 훌륭한 분들께 물어보시고 보잘 것 없는 제게 어려운 질문은 자제해 주십시오^^

 

그래서 나도 나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만일 리처드 도킨스가 옳다면, 나는 왜 이런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내 동생들은 잘은 못해도 남들만큼은 공부를 했는데, 나는 지진아였지 않은가? 같은 부모인데도 이토록 차이가 날 수 있는가?

 

그래서 생각다 못한 나는 핑계거리를 하나 만들었다: 내가 띨띨하고 까칠해진 이유는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 때문이 아니라 생장과정에 있는 듯하다.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개인의 사생활이라...

 

그래서 나에게도 한 가지의 핑계거리가 생겼다. 내가 띨띨했기 때문에 페이스북에서 그런 소통들도 하지 않았을까?

 

만일 내가 똑똑해서 미시건대학교나 아리조나 대학교에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면 과연 내가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었겠는가?

 

그냥 신께서 나를 낮추신 것으로 믿기로 했다. 내가 이와 같이 주장했더니, 모 신학교수께서는 크크 웬 신정론입니까?라고 하시더라,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핑계거리를 만들지 않는다면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니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마시길 바란다.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차이가 있다. 나도 내가 좀 잘나고 싶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하지 않은 듯하다!

 

내 마음대로 해 본 게 몇 개나 있나?

  • 도배방지 이미지

신학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