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된 식민지와 400년 된 식민지

일본의 식민지와 중국의 식민지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5/24 [20:45]

35년 된 식민지와 400년 된 식민지

일본의 식민지와 중국의 식민지

공헌배 | 입력 : 2019/05/24 [20:45]

 

사람들은 흔히 일제 35년 간의 식민지 경험(기억)을 문제시하여, 오늘날까지도 곱씹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400년 넘는 동안의 식민지 기억에 관하여는 별 의식이 없는 듯하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일본으로부터는 35년 정도의 식민지를 겪었지만 고대의 중국으로부터는 400년 정도의 식민지를 겪었다(낙랑).

 

()나라가 망하고, (前漢)나라 때에 설치 된 식민지(위성도시: 낙랑)BC 108-AD313년까지 무려 4백년이 넘는 동안 평안도 지역에 존속했다. 한국현대사의 일제 식민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랜 기간 동안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이씨 왕조나 그 시대의 지식인들의 면모들을 볼 때에는 그 고대의 낙랑을 별로 슬픈 기억으로 여기지 않는 듯 했다. 반면 한국현대사에 나타났던 35년간의 식민지는 두고두고 곱씹는 경향이 있다.

 

이게 왜 이럴까?

 

중국의 식민지 생활을 잊어도 되고, 일본으로부터의 식민지 생활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인가?

 

어찌 보면 이와 같은 현상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정신질환이 아닐까?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망할 때까지 낙랑군이 존속되었다.

 

, 고조선을 멸망시킨 전한(前漢)낙랑군이라는 위성도시(식민지)를 만들었는데, 그 전한(前漢)이 망했을 때에도 낙랑군은 건재했었다. 즉 자신들의 도시(식민지)를 세웠던 그 본국이 망했을 때에도 존속했던 위성도시가 낙랑군이다.

 

 

더 나아가 전한(前漢)이 망하고, 후한(後漢)이 세워졌는데, 그 후한이 망할 때(AD 220)까지도 낙랑군은 망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다시 말해 고구려에 의해 망할 때까지 끈질기게 버틴 그 위성도시가 바로 낙랑군이다.

 

, 자신들의 위성도시(漢郡縣)를 세워 준, 그 본국(前漢)의 국운이 기울어 망하고, 그 뒤에 세워진 후한(後漢)이 건국되고 망할 때까지도, 망하지 않고 존속되었던 그 놀라운 위성도시가 낙랑군이다. 후한(後漢)이 망하고도 93년이나 더 버틴 도시국가가 바로 낙랑군이다.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평양(소위 낙랑 유적지구)에서는 중국 식 화폐들과 중국 식 화장실 시설, 중국 식 토기들이 발굴됐고, 심지어는 그 고대 시대에, 이미 평양(낙랑군)<논어(論語)>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정도로 많이 중국 계 유물들의 수많은 증거들이 쏟아졌다.

 

기록의 증거가 많지 않아, 그 군현이 평화로운 도시국가였는지, 국민들은 굶주리지 않았는지, 민란의 증거들은 없었는지 확실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특이한 기록이 있다:

 

3대 노례 왕 4년에 고구려의 3대 무휼왕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北帶方)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 왕 27년에 광호제(光虎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이남의 땅은 한()나라에 소속되었다(一然, <三國遺事>, 紀異 第一, “樂浪國.”).

 

14(AD 37)에 고구려 왕 무휼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의지하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金富軾,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儒理尼師今.”).

 

 

,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키니, 그들은 대방 사람들과 함께 신라로 망명했다고 한다. 그럼 도대체 신라가 뭐 길래 하필이면 그쪽으로 망명했을까?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를 알천 양산촌, 둘째를 돌산 고허촌, 셋째를 취산 진지촌-혹은 간지촌이라고도 한다-, 넷째를 무산 대수촌, 다섯째를 금산 가리촌, 여섯째를 명활산 고야촌이라 했다. 이들이 후에 6부가 된다(金富軾,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始祖赫居世居西干.”).

 

, 신라는 고조선 유민(遺民)들의 마을들, 다시 말해 고조선 타운이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고조선이 망했을 때 한(前漢)나라에서는 군현을 설치했는데, 그 중 가장 오래 된 위성도시(군현)가 낙랑이었고, 그 낙랑군의 사람들이 고조선 유민들의 타운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다. 더 쉽게 말하면, 고대의 낙랑 사람들은 고구려를 해방군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여겼다.

 

만일 고구려를 해방군으로 여겼다면, 환영해야 했을 텐데, 그게 아니라 반대로 신라로 망명해버렸다. 그것도 대방 사람들의 일부와 함께...

 

그럼 낙랑 사람들을 받아들인 그 신라 사람들은 고구려를 좋게 생각했겠는가?

 

우연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신라는 훗날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모두 공격했다!

 

4백년이 넘는 위성도시, 낙랑군에는 3천기가 넘는 고분군이 있으며, 이 고분의 숫자는 경주의 고분들과도 맞먹을 만큼 많다. 평양에 있는 고구려 고분들은 단지 숫자로만 한다면 낙랑 고분들한테는 게임 안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낙랑군을 고대 중국의 책에서는 무엇으로 여겼을까?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倭人)이 있고 그것이 나뉘어 백여 국이 있었다(<漢書> 28 下 地理志, 8 )”.

 

, 낙랑 사람들은 왜인(倭人)들이었다!

 

그럼 대방 사람들은 달랐는가?

 

<삼국지>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30, ‘전을 주목해 보자:

 

後漢 建安 년간(196-219)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에 帶方郡을 설치하고(중략) 韓濊를 토벌하였다.(중략) 이후 倭漢은 대방군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낙랑이나 대방 모두 왜()와의 연관이 있다.

 

이 대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한예왜한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을 해석해 보자; 첫째, 韓濊라는 단일적 인종, 둘째, 라는 두 인종의 복합성, 셋째, .다시 말하면 () 또는 =라는 견해, 넷째, .로 보는 경우, 다섯째, (), 그러니까 =, 여섯째 와의 복합적인 경우, 일곱째, 음차(音借)를 활용한 해석으로 좁힐 수 있다.

 

의 음차이고, ‘의 음차다. 이리 해석하는 이유는 공손강이 한예를 토벌했다면, 당연히 한예가 공손강의 관할 하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예를 음차 하여 왜한으로 썼을 뿐, ‘왜한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즉 한예의 다른 표현이 왜한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궁금하여 이 문장에 대한 해석을 전(前)에 윤내현 박사님께 의뢰해 보았다.

 

아래는 필자와 윤내현 박사님과의 대화를 요약한 것이다:

 

공헌배: 교수님, <삼국지>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30, ‘전에 나오는 한예왜한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윤내현: 대방 안에 , , , 라는 네 개의 종족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공헌배: 그리 넓지도 않은 영토에 네 개의 종족이나 살았다는 말입니까?

 

윤내현: 그런 것 같습니다.

 

공헌배: 혹시 음차를 활용한 해석으로는 볼 수 없겠습니까? 공손강이 한예를 토벌했는데 무엇 때문에 倭漢이 공손강의 관할 아래에 들어갑니까? 한예를 토벌하였으면 당연히 한예가 그 관할 아래에 있어야 정상 아니겠습니까?

 

윤내현: 사료에 그리되어 있으면 사료를 존중하여야 합니다. (전에) 이병도 선생이 어느 자료에서 위치인식이 이해되지 않아 사료를 고쳐 이해하였습니다. 즉 그 대목에 있어서만큼은 사료의 오기(誤記)일 것으로 이해한 거죠. 그러나 사료는 그리 이해하면 안 됩니다.

 

공헌배: 교수님, 그래도 의 음차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윤내현: 다를 겁니다. 사가(史家)가 그리 적은 데에는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해석은 필자로서도 쉽게 답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위의 문장으로 보아 또는 와는 관련이 깊어 보이는데, 정확히는 무어라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분명해 보이는 것은 대방은 또는 와는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설령 여기서의 왜()가 예()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라는 글자는 이라는 글자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적어도 대방으로 불린 지역은 로도 불리었거나 대방현의 구성원들 중에는 왜인들도 포함되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것을 으로 불렀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일 가능성은 없는가이다. 윤내현 박사님의 주장대로 하면 분명 은 차이가 있어야 한다.

 

이라는 문장의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의 출처 때문이다. 만일 왜가 중국인이라고 한다면 그 , 고대의 고조선 중 하나였던 대방을 지배하러 온 점령군이었거나 중국으로부터 고조선으로 망명을 한 중국인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가 한국인이었다면 그 는 고조선의 거수국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의 를 고조선 민족의 일부로 여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는 중국인들과도 연관이 있다. 충분히 신뢰하기는 어렵겠지만 아주 오래 된 <산해경>의 기록을 주목해보자;

 

개나라는 거연 남쪽이고 왜의 북쪽이며 왜는 연나라에 속한다(<山海經> 12 海內北經).

 

그래서 왜()는 오늘날의 북경지방인 옛 연()나라구역이었다. 또한 왜()는 중국 본토 안에도 있었다!

 

그렇다면 왜인들은 옛 중국인들의 일부이고, 그들은 고조선으로 가서도 중국인들의 정체성을 가진자들(倭人)로 남아 있었던 것일까? 알기 어려운 문제다!

 

특이한 것은 고조선을 멸망시켜, 설치한 군현인 낙랑군()’로도 부를 수 있었고, 또한 후한(後漢)건안 년 간에 설치한 대방군에도 왜인들이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의 ()’라는 단어는 식민지 도시국가(중국의 위성도시)’에 연관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음과 같다:

 

()는 고조선 사람들인가? 아니면 중국으로부터 고조선을 점령하러 온 사람들인가?

 

다시 말해 고대에서의 왜인(倭人)들은 점령자들인가 아니면 토착민(고조선인들)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하필 한반도의 식민지 문제에는 ()’라는 단어가 따라 다니는가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20세기의 왜(일본)는 한반도 사람들에게 강한 저항감을 주었지만 고대 사회에서의 왜(낙랑이나 대방)는 한반도 사람들에게 그다지 반감을 주지 않은 듯한 인상이 남는다!

 

그래서 ()’라는 단어는 아주 인상적이다. 하나는 4백년 된 식민지를 연상케 하고, 하나는 35년 된 식민지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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