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를 찾고 있습니다

제약회사의 판매원들보다는 의사들이 필요합니다

공헌배 | 기사입력 2019/05/19 [22:19]

의사를 찾고 있습니다

제약회사의 판매원들보다는 의사들이 필요합니다

공헌배 | 입력 : 2019/05/19 [22:19]

 

존경하옵는 한국조직신학회 동역자 여러분,

 

공헌배 인사올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는 지금 의사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병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병을 치료하실 분들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훌륭하신 박사님들 그리고 저명하신 목사님들 그리고 몇 개 국어 이상을 구사하실 수 있으신 해박하신 분들을 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만나보았습니다. 한국에는 이 많은 인재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는 병들어가고 있을까요?

 

 

적지 않은 목사님들은 훌륭하신 신학자님들을 신뢰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은 성도님들 중에는 더러 답답하여 신학자님들에게 질문을 하고는 싶은데, 아예 대화의 상대조차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학서적들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리고 신학자님들이 얼마나 고매하신 말씀들을 하셨으면 박사인 저도 알아듣지 못할 말씀들이 수두룩할 정도였습니다.

 

아프고, 괴롭고, 힘들어 죽겠는데,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키에르케고오르의 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의사는, 그가 의사(그 일에 도통한 사람)인 이상, 사람이 자신의 용태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만약 각 사람이 자신의 용태에 관하여 말하는 것(건강하다든가, 앓고 있다든가 혹은 번뇌하고 있다든가 등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의사로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의사는 단지 약을 처방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병을 진단해야 한다.”(쇠렌 키에르케고오르,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의 보편성”).

 

이 말을 따른 즉, 의사는 환자가 하는 말 만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환자가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면 환자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즉 의사는 환자보다도 환자를 더 잘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곳곳에서 아우성칩니다. 그게 들리지 않으십니까? ‘제발,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의 그 많은 신학자 분들은 이 소리에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 분들은 교회를 얕잡아보거나 교인들이나 목사들을 경멸합니다.

 

반면 어떤 목사님들은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도 모르시면서 신학자들을 경멸합니다. 그래서 서로 반목합니다. 그렇다면 이 현상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큰 힘을 가진 자들에게는 큰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신학자님들은 한국교회의 희망이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선택된 분들 아니십니까?

 

보통 이상의 지성과 보통이상의 능력과 특성을 가지신 분들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존경의 마음을 갖고 치료 좀 해주셨으면 했는데, 지금까지의 주된 양상은 그 훌륭하시며, 그토록 어려운 과정까지 밟고 등장하신 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병명조차도 찾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병을 진찰할만한 진찰도구는 제대로 갖추고 계십니까? 이를테면 CT촬영이나, MRI촬영이나 피검사 등 각종 검사도구를 다 갖고 한 명의 환자에게 다가가듯이, 신학자분들은 왜 한국교회에서 이런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지, 진찰은 하고 계시느냐고 여쭙고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태고적 기억까지 탐구합니다. 심리학자들은 환자가 알지 못하는 부분의 그 어떤 영역에까지 추적하여, 그의 이상행동을 찾아냅니다.

 

즉 제대로 된 의사라면 환자가 기억조차 하지도 못하는 과거의 일까지도 혹은 상처까지도 찾아냅니다. 환자가 무슨 세균에 감염되었는지를 알아냅니다. 환자는 그냥 아프다고만 하지만 의사는 그의 말만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아기는 그냥 울 뿐이지만 엄마는 왜 우는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못하면 그 아기는 죽습니다.

 

저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학회를 참석해 보았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분들이 많으신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병을 치료하실 분은 누구시죠?

 

지금까지 제가 느낀 인상은 한국의 신학자분들은 의사가 아니라 제약회사의 판매원들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나온 이 약품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품질이 A급이며 약값은 얼마이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나는 판넨베르크를 전공했다, 나는 불트만을 전공했다, 나는 칼 바르트를 전공하였다.... 그래서요?

 

자신들이 수입해 온 약품의 성질 및 효능이 무엇이라고 소개는 하시는데, 그러면 그 약만 보면 병이 저절로 낫습니까? 지금까지의 신학자분들은 나는 약을 만들었으니까, 나는 약을 제대로 수입해 왔으니까 이 약을 드실 분들은 스스로 알아서 드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약물 오남용은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토록 좋은 약을 가져왔는데 내게 무슨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면 다 됩니까?

 

왜 한국의 그 많은 신학자 분들은 의사나 약사가 되지 않으시고 제약회사의 판매원과 같은 역할을 하십니까? 왜 한국의 신학회는 병리검사실이나 진찰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습니까?

 

도스또옙스키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요즘은 어떤 병이건 다 고쳐주는 옛날 의사는 완전히 사라지고 전문 의사들만이 신문에 광고를 내고 있지. 만일 자네가 콧병에 걸렸으면 파리로 가라고 하지. 거기 가면 코를 고치는 유럽의 전문의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파리에 가보면 그 전문 의사라는 작자가 코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서는 자기는 오른쪽 콧구멍 밖에 못 고치겠다, 왼쪽 콧구멍은 내 전문이 아니어서 못 고치겠으니 비인으로 가 보라, 거기 가면 특별히 왼쪽 콧구멍만 고쳐주는 전문의가 있다는 거야.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나? 결국 나는 민방(민간)요법에 의존하기로 하였지.(중략) 그런데 글쎄, 호프의 맥아정(麥芽精)이 내 병을 고쳐주었지 뭔가!”(F. M. Dostoevsky, <카라마조프의 형제>, 11, 이반 표드로비치의 “9. 악마, 이반의 악몽에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민간요법 앞에 방치되어 있는 듯합니다. 워낙 훌륭하시고, 세밀하신 전문가들이 많으셔서 어느 병원의 무슨과로 가보라고 안내는 잘도 하시는데, 그걸 다 할 수 있으면 뭐 하러 환자하겠습니까?

 

오래 전 저는 간단한 성서지식이 궁금하여, 어느 저명하신 교수님께 전화로 문의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수님은, 어느 교수님께서 쓰신 무슨 책을 찾아보면 나온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는 그 책을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도서관에는 없는 것 같아 직접 출판사로 문의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 책은 절판되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쭌 질문은 백과사전적인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전화상으로, 상식적으로 답을 해도 충분할만한 것이었는데, 그 분은 저에게 전화비 낭비에 시간낭비까지 하면서도 결국 책도 찾지 못하는 그런 말씀을 주시고 말았습니다.

 

존경하는 신학자분들이시여!

 

여러분은 환자를 앞에 두고, 칼 바르트의 책을 찾아보라는 둥, 칼빈의 책을 읽어보라는 둥, 독일어부터 배우라는 둥, 요사이에는 불어가 대세라는 둥 이런 종류의 말들을 하실 겁니까?

 

이와 같은 태도는 환자들을 민간요법으로 내몰고 마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민간요법이 때로는 효과를 보지만 잘못 사용하다가는 병이 도져서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신학자분들은 얼마나 고매하시고 지고하신지, 마치 다음과 같아 보입니다: 내 진료비는 비사요, 저의 아까운 시간을 빼앗지 마시오, 나는 특진비만큼은 반드시 받는 사람이라오, 내가 의사면허 따는 데 몇 년 걸린 줄 아시오.

 

, 내가 16세기 불어나 라틴어로 각주를 달면 전문가 이외에는 알아보지도 못할 걸?’ ‘의사들은 약 처방을 간호사에게 줄 때 아주 전문적인 용어를 갈겨씀으로써 나의 권위를 더하지, 나의 전속 간호사 말고는 내 처방전을 읽지도 못 할 걸?’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처방전을 갈겨쓰셔도 좋고, 배운 의술이 훌륭하여 좀 잘난 듯이 자랑하셔도 좋습니다. 다 좋은 데 환자는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환자는 민간요법에 의존하려 합니다. 진찰도구도 모르고, 어떤 병리검사를 해야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아파서 소리만 지르고 있는데, 병원에 가 보라고 하니까, 이 환자는 무슨 소리, 내 병은 내가 제일 잘 알아...”라고 말합니다.

 

의사를 신뢰하지도 않고, 어느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으면서 의사를 아예 무시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나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개신교회에서는 환자를 이해해 보려는 의사보다도 환자 앞에서 자신의 약을 자랑하는 제약회사의 판매원들을 더 많이 보아왔으니까요!

 

더러 한국의 신학자 분들 중에는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이라며 제시를 하시는데, 문제는 그게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분별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전문의 면허증을 가진 사람의 거짓말을 가려낼 만한 환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심지어 외국에서 유학할 때 도취되었던 그 도구로 한국교회를 진단한다거나 때로는 한국교회를 난도질 해댑니다.

 

칼 바르트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이렇다, 불트만의 설교를 볼 때 한국 목사들의 설교는 이렇다, 에밀 브룬너의 설교는 참으로 훌륭한데, 한국의 목사들은 브룬너의 경지에 다다를 수도 없다라는 식으로 난도질을 해댑니다.

 

이게 과연 바람직 할 까요? 과연 그동안에 나온 소위 저명한 신학자들을 도구로 하여 한국교회의 문제를 진단한다면 그 진찰에 대한 신뢰도는 어느 정도라고 여기십니까?

 

오래 전, 저는 친구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친구야, 예를 들어 한국교회에서 나오는 방언 문제라는 게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종교학자들이 더 잘 이해하겠나? 신학자들이 더 잘 풀이하겠나?”라고 하였는데, 그 친구의 말: “그야 당연히 종교학자들이 더 잘 알지!”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친구야, 한국개신교회에서는 기현상이 생기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 사회심리학자나 인류학자나 종교학자들이 더 잘 알겠나? 아니면 신학자들이 더 잘 알겠나?”라고 하였더니, 그 친구가 왈 그야, 당연히 종교학자나 사회심리학자들이 더 잘 알지!”라고 했습니다.

 

이게 친구 목사의 신학자들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과연 이게 그 친구 한 사람만의 일일 것 같습니까?

 

과연 여러분들은 교회의 목사님들이나 교우님들로부터 몇 차례의 질문을 받으셨습니까? 저의 개인적 경험을 말씀드려 대단히 송구합니다만 저도 현장에 와 보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저는 교수님들의 이해에 대해 상당한 문제를 느낍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교수님들의 글들 중 상당 부분은 한국교회의 아픔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글들이 즐비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현장을 무시하시면서 교회와 상관없는 글들을 쓰시든가 아니면 순수 이론으로서 학문의 발전을 위해 연구를 깊게 하시든가 둘 중 하나라도 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여성신학, 2) 과학과 신앙, 3) 하나님의 선교 등등

 

저는 여러 편의 논문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이나 여지 껏 만나왔던 목사님들이나 여러 교회들의 사정들을 살피었을 때 위와 같은 문제로 고민을 하는 목사님들은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현장에서는 거의 고민꺼리조차도 되지 않는 그런 주제들로 학계에서는 논문집들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의 아젠다를 한국에서 발표한 셈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장로문제나 교역자의 임지문제는 얼마나 심각했으면 제가 쓴 논문(16세기 제네바의 목양방식을 통해 본 교역자의 위상)에 대한 소개만 보고도(그 당시 그 분은 그 논문을 읽지도 않으셨는데) 제게 전화를 하는 분이 계셨겠습니까? 그동안 교수님들이 목사님들의 아픔을 얼마나 외면 하셨으면 이름도 없던 저에게 목사님께서 전화를 다 주셨겠습니까?

 

교회가 크든 작든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이 겪는 고통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물론 목사님들이 다 잘하신다는 말도 아니고, 문제가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이토록 교회의 아픔이나 목사님들의 아픔을 외면해도 되는지 제가 교수님들에게 정중하게 여쭙고 싶습니다.

 

무엇 때문에 학회에서는 그토록 잘나신 분들만 부르십니까? 왜 소위 성공한 사람들 위주로 초청합니까? 실패한 사람들, 아픔이 있는 사람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등등 왜 이런 사람들의 소리에는 그토록 인색합니까? 왜 저명한 외국의 교수님들을 모셔서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시간을 쓰게 하십니까? 왜 학회의 강단과 교단은 그런 일들에 그토록 많은 예산을 쓰십니까?

 

울고 계시는 사모님들, 추위에 갈 곳 없어 고민하는 교역자들, 노숙자들 등 왜 이런 사람들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십니까?

 

정말, 우리 주위에는 한국교회의 병증을 제대로 진단할 만한 의사가 부족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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